만년 적자에서 찾아낸 블루오션, 30년 내다본 윤활기유 사업 [SKI 혁신성장 연구]

SK이노베이션 혁신성장 연구

③고급 윤활기유 블루오션 개척-'비전 테이킹' 경영 혁신

다음 달 창립 60주년을 맞는 SK이노베이션은 1962년 대한석유공사에서 출발했다. 1980년 선경(SK의 전신)에 인수된 이후 석유화학, 종합에너지, 바이오, 배터리와 그린에너지까지 섭렵하면서 지난 60년간 변신과 성장을 거듭해왔다. 오늘날 SK를 재계 2위 대그룹으로 만든 토대가 된 SK이노베이션의 혁신성장 10가지 성공 비결에 관한 학술 심포지엄이 지난달 30일 기업가정신학회 주최로 열렸다. 오늘날에도 유효한 경영 인사이트를 발굴하는 자리였다. 이날 발표된 내용과 연구결과를 정리해 연재한다. 세 번째 혁신성장 스토리는 윤활기유 블루오션 개척. 배종훈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의 분석 발표를 토대로 정리했다.

고급 윤활기유 개발에 투자한 역발상 혁신

20년. 내수용 윤활유 기업이었던 SK이노베이션이 글로벌 고급 윤활기유 시장에 진출해 1등 기업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윤활기유는 윤활유의 주원료다. 엔진오일부터 보습 크림, 양초, 자외선 차단제, 연고 등의 원료로도 쓰인다. SK이노베이션이 독자 생산하는 글로벌 1위 고급 윤활기유 '유베이스(YUBASE)'가 시장을 제패한 데엔 실패에서 비롯한 혁신이 있었다. 레드오션이었던 일반 윤활기유 시장을 거치지 않고, 미래 성장 가능성이 높은 고급 윤활기유 개발에 올인한 과감한 '역발상'이었다.

SK이노베이션 윤활유 사업 자회사 SK루브리컨츠가 생산하는 그룹 3 윤활기유 '유베이스(YUBASE)'. 사진 SK이노베이션

SK이노베이션 윤활유 사업 자회사 SK루브리컨츠가 생산하는 그룹 3 윤활기유 '유베이스(YUBASE)'. 사진 SK이노베이션

S사 윤활기유 직생산에 놀란 가슴 쓸어내리다

국내 윤활유 생산 출발점은 대한석유공사가 1968년 울산에 세운 배합 공장이었다. 그러나 유공의 윤활유 사업은 선경그룹에 인수된 이후 1990년대 초까지도 시장에서 존재감이 없었다. 지금은 윤활유와 윤활기유 사업이 SK이노베이션의 중요한 수익원이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만년 적자에 허덕이는 사업부였다.

당시는 정유 산업이 국가 산업이었기 때문에, 정부가 정유사의 수익성을 강력하게 규제했다. 규제가 강한 만큼, 경쟁 강도는 현저히 낮았다. 유공·쌍용정유(현 에쓰오일)·호남정유(현 GS칼텍스) 등 3개사만이 시장 지배적 생산자로서 안정적인 과점을 이뤘다. 유공 역시 연구·개발(R&D)보다는 수입 윤활기유를 가공한 윤활유를 국내 유통하는 데 집중했다. 


위기를 맞은 건 1980년대 후반 산업 자율화가 이뤄졌을 때다. 당시 쌍용정유가 윤활기유를 직접 생산하면서 가격 경쟁을 유발했다. 시장 주도권이 쌍용정유로 넘어갈 상황이었다. 1988년 정부가 석유정제 산업 단계별 자율화 계획을 발표하면서 규제 측면에서도 변화의 조짐이 일었다. 1993년 국제에너지기구(IEA)가 규제 완화를 권고한 데 이어, 1994년 정부가 정유공장 증설 허가제를 폐지한 것. 원유 수입과 정유 모델로는 한계에 직면했다.

SK이노베이션 울산 윤활기유 공장. 사진 SK이노베이션

SK이노베이션 울산 윤활기유 공장. 사진 SK이노베이션

블루오션 '고급 윤활기유'를 선점하라, U-프로젝트

라이선싱 기술을 이용해 기성 윤활기유 공정 설계를 진행하는 데만 1990년 기준 예산 2597억원이 들 것으로 추산됐다. 후발주자가 감당하기엔 벅찬 투자비였고, 시장 반응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연구진은 포기하지 않았다. 1992년, 예상액보다 적은 1200억원으로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고급 윤활기유' 대량 생산에 도전하겠다며 경영진을 설득했다.

윤활기유는 점도와 점도 지수, 황 함량 등을 기준으로 그룹 1부터 그룹 5 품질로 나뉜다. 숫자가 올라갈수록 품질이 높다. 당시 고급 윤활기유의 시장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1993년 전사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그룹 3 윤활기유 개발, 'U-프로젝트'에 시동을 걸었다. 연구진이 생각해낸 윤활기유 제조 공정(UCO, UnConverted Oil Technology)은 업계 첫 시도였다. 기존 공정의 앞뒤를 바꿔 점도별로 중간제품을 생산, 이를 탈납하고 촉매 처리해 윤활기유를 만드는 방식이었다. 시황에 따라 생산량을 탄력적으로 조절할 수 있고, 시설 구축 비용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1995년 마침내 고급 윤활기유 유베이스의 대량 생산에 성공한다. 

그해 10월 울산 제1 윤활기유 공장이 완공됐고, 글로벌 엔지니어링 기업 레이시온(Raytheon)에 UCO 기술 라이센싱을 판매했다. 이후 네덜란드(1995년), 일본(1996년)에 각각 3만 배럴, 7천 배럴을 수출하면서 시장 진입에 성공했다. UCO 공정은 22개국에서 특허를 승인받았다. U-프로젝트는 기존에는 없는 고성능의 윤활기유를 생산해냈고, 새로운 범주의 시장, 즉 블루오션을 개척했다. 만년 적자 사업부를 핵심 수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환경에 선제적으로 대응해 경쟁력 확보

유베이스는 원유를 정제하고 남은 ‘찌꺼기’인 미전환유(UCO, unconverted oil)로 생산한다. 사용 가치가 '제로(0)'인 재료로 최고급 윤활기유를 만드는, 부가가치가 큰 사업이다. 또한 질소와 황 함유량이 적어 환경 규제가 강한 유럽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유럽연합(EU)이 2014년 의무화한 '유로 6(Euro VI) 차량 배출가스 규제 기준'에도 적합하다. 환경에 대한 글로벌 흐름을 읽고 선제적으로 대응한 덕분에 완성차 업체의 수요를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도네시아 두마이에 위치한 '파트라SK(SK-페르타미나 합작사)' 윤활기유 공장 전경.

인도네시아 두마이에 위치한 '파트라SK(SK-페르타미나 합작사)' 윤활기유 공장 전경.

글로벌 파트너링으로 고급 윤활기유 세계 1위 

그룹 3라는 새로운 윤활기유 시장을 만들어낸 SK이노베이션의 투자의 진면목은 시장 진입 이후에 드러난다. 성공의 핵심은 조기 판로 개척이었다. SK는 거래 실적을 조기에 확보하기 위해 글로벌 윤활유 기업인 캐스트롤(Castrol)에 유베이스 납품을 시도했고 성공했다. 이런 초기 성과는 BP 등 메이저 기업으로 거래처를 확대하는 토대를 제공했다.

판로 개척 후에도 안정적인 생산 역량을 확보하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적기에 시설 투자가 필요했다. 국내 업계의 관행에서 벗어나 글로벌 현지에 원료 공장을 구축해야 한다는 게 최태원 SK 회장의 판단이었다. 최 회장은 2005년 부산 APEC 정상회의 참석차 방한한 인도네시아 유도유노 대통령에게 윤활기유 합작사업을 제안했다. SK는 인니의 국영기업인 페르타미나(Pertamina)와 손잡고 지분 65%를 투자해 윤활기유 합작사를 설립했다. 2008년 완공된 인니 두마이(Dumai) 공장은 국내 울산 2공장과 더불어 초과 수요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줬다.

2011년 스페인 최대 정유사인 렙솔(Repsol)과 윤활기유 그룹 3 제조 공장 설립 투자에 합의해 유럽 시장 진출 기반을 닦았다. 합작법인의 이름은 '일복(ILBOC, Iberian Lube Base Oils Company)'으로, SK가 70%의 지분을 가졌다. SK는 기술과 마케팅 네트워크를, 렙솔은 원재료와 인프라 제공하는 협업이었다. 2014년 스페인 남부 카르타헤나(Cartagena)에 연 63만톤 캐파의 공장이 준공됐다. 그 결과 SK루브리컨츠는 하루 생산량 기준 7만800배럴의 생산 역량을 갖추게 됐다. 

스페인 카르타헤나 윤활기유 공장 전경.

스페인 카르타헤나 윤활기유 공장 전경.

배종훈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인터뷰

배종훈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가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SK서린사옥에서 개최된 'SK이노베이션 60년 혁신 성장 연구 심포지엄'에서 발표하고 있다.

배종훈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가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SK서린사옥에서 개최된 'SK이노베이션 60년 혁신 성장 연구 심포지엄'에서 발표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 창립 60주년 기념 '혁신성장 연구'에 참여한 소감은.
"경영을 분석하는 일반적 방식은 개별 사건 혹은 의사결정의 특징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기업사 분석은 개별 사례 분석만큼 중요하나 한국적 현실에서 많이 외면된 기법입니다. 60년간 성공적으로 성장한 조직을 분석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SK이노베이션의 윤활기유 사업을 연구 테마로 선정한 이유는요.
"좋은 회사를 구분하는 기준은 여럿이지만, 결국 하나의 기준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회사에 일등 상품이 있는가입니다. 시장에서 고객의 첫 번째 선택이 되는 상품을 가지고 있는 회사는 그 누가 뭐라 해도 좋은 회사입니다. SK이노베이션의 자회사 루브리컨츠가 만드는 윤활기유는 지난 10년 이상 윤활기유 그룹 3시장에서 점유율 1등을 하는 상품입니다."

SK이노베이션 60년 혁신의 본질이 리스크 테이킹(Risk Taking)이 아닌 '비전 테이킹(Vision Taking)'이라고 했는데요.
"경영에 대한 잘못된 통념이 많이 있지만, 그 대표적인 것이 혁신에 관한 것입니다. 무모한 도전은 혁신이 아닙니다. 혁신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과정입니다. 아이디어만 갖고 하는 혁신은 리스크 테이킹에 그칠 수밖에 없어요. 경영자는 두 가지를 조심해야 합니다. 그저 아이디어만 내놓고 구성원에게 임파워먼트(위임)하는 것, 혹은 해당 분야 전문가 대신 본인이 직접 일을 챙기는 것입니다. 전자는 경영자의 직무유기이고, 후자는 권한남용입니다." 

혁신과정에서 경영의 역할은 어때야 할까요. 
"대략적인 아이디어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결과를 상상하고 그것을 구현할 변화관리를 책임져야 합니다. 소위 '디벨롭 축구'와 같습니다. 비전 테이킹은 이러한 변화관리 역량을 말합니다. 여러 이해관계자에게 내가 상상하는 결과를 설득하고, 그들이 그 결과에 동참하고 협업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합니다. 지난 60년간 SK이노베이션의 성장은 비전 테이킹의 성공이고, 변화관리의 성공입니다."

SK이노베이션 윤활기유 사업 성공의 핵심 요인은.
"핵심은 시장의 후발 주자로 그룹 1·2 시장에 진입하기보다는, 태동기에 있던 그룹 3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겁니다. 정제과정에서 여러 번 재처리하고 남은 찌꺼기인 미전환유에서 고수익의 윤활기유를 만들어 내는 공법은 그 자체로 매우 효율적인 공정 혁신입니다. 그러나 좋은 기술이 반드시 좋은 시장을 만드는 건 아닙니다. 태동기의 시장을 만드는 건 시장 참여자에게 해당 상품의 이익을 설득하고, 가치 사슬에 동참하게끔 유도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판로 개척과 초기 캐파 구축, 가치사슬 참여자의 확보가 필요합니다. 이는 SK에서 글로벌 파트너링이라고 부르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혁신이 성공하려면 시장 진입 이후의 역량 개발이 중요한데, 윤활기유 사업은 좋은 성공 사례입니다."

이번 연구의 성과와 의의를 꼽는다면.
"일등 상품은 기획의 성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획 이후가 더 중요합니다. 그것이 경영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경영은 시장 진입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경영의 참모습은 시장 진입 이후에 보입니다. 매우 지루한 그리고 절대 신비롭지 않은 꾸준한 실천인 판매 활동이 경영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혁신성장 연구를 통해 얻은 가장 인상적이었던 인사이트는요.
"경영은 마이크로 매니지먼트가 아니라 메타리더(Meta-leader), 즉 구성원이 일하게 바탕을 깔아주는 것이고, 임파워먼트가 아니라 결과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그 결과를 만들어내는 비전 테이킹입니다. 하나의 시장을 만드는 작업은 비전을 공유하고 실천을 위한 바탕을 깔아내는 작업입니다. 그것이 혁신이고 변화입니다. SK이노베이션의 지난 60년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발견할 수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SKI 혁신성장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