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영어 100점 수학 100점보다 중요한 배움, 서당에서 알아봐요
② "하늘 천 땅 지"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 가르치는 서당 교육 맛보기
조선시대 화가 단원 김홍도의 『단원풍속도첩』에 실린 그림 '서당'을 보면 수염을 기른 근엄한 표정의 훈장님을 중심으로 아홉 명의 학동이 앉아있습니다. 그중에 한 명은 훈장님에게 혼이라도 난 것인지 울상인 채로 훌쩍이고, 다른 학동들은 이를 보면서 키득키득 웃고 있죠. 많은 사람에게 조선시대 서당(書堂)은 이 풍속화 속의 모습으로 각인돼 있습니다.

안수민·박리안 학생기자와 이예준 학생모델(왼쪽부터) 이 정명래 훈장에게 수업받기 전 의관을 정제하고 공수 자세로 바르게 앉았다.
조선시대 초등학교, 서당
서당은 16세기 이후 사림파가 성장하면서 각 지방 마을, 즉 향촌에 본격적으로 설립된 사설 초등 교육기관이에요. 사림파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양반 지배층을 뜻하는데, 정치에 관여하는 관료이자 학자였죠. 이들은 관직에 나가기 전에는 서당에서 학문을 배우고, 퇴관 후에는 직접 서당을 건립하거나 운영에 참여하면서 성리학적 이념에 근거해 백성을 교화시키고자 했어요. 이를 통해 관학의 영향이 미치지 못하는 작은 단위의 촌락까지 전국 곳곳에 서당 설립이 활발해졌죠.
서당은 설립을 위한 일정 조건이나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설립 주체에 따라 유형이 다양했습니다. 훈장 자신이 생계 혹은 취미로 설립한 경우도 있었지만, 마을에서 경제적 사정이 넉넉한 유지가 자신의 아이들이나 친척을 교육하기 위해 세우기도 했죠. 또 자녀 교육에 관심 있는 몇몇 개인이 서당계를 만들어 훈장을 초빙해 계원의 자제를 교육하거나, 동네 전체가 서당계를 형성해 서당을 세우기도 했어요. 이렇게 설립된 서당은 대략 7~16세 연령의 학동들에게 한문뿐 아니라 각 촌락에서 공유되던 규범과 질서도 가르쳤습니다.

정명래(맨 앞) 훈장과 함께 바른 자세로 사뿐사뿐 걷는 법을 연습 중인 소중 학생기자단. 일상에서 행동을 단정하게 하는 것이 곧 마음을 수양하는 방법이다.
오늘날 사전적 의미의 서당은 "예전에 한문을 사사로이 가르치던 곳"입니다. 서당이라고 하면 댕기 머리를 한 아이들이 훈장 앞에 앉아 "하늘 천(天), 땅 지(地), 검을 현(玄), 누를 황(黃)"을 외우면서 『천자문(千字文)』을 배우는 모습을 떠올리는 것과 일치하죠. 하지만 서당은 단순히 글만 배우는 공간이 아니었어요. 박리안·안수민 학생기자와 이예준 학생모델이 서울 중구에 있는 남산공원 호현당을 찾아 서당 교육을 체험해 보기로 했죠. 정명래 훈장이 소중 학생기자단을 맞이했습니다.

조선시대 화가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첩에 등장하는 그림 '서당'. 국립중앙박물관
정 훈장의 설명을 듣던 리안 학생기자가 "지금의 초등학교와 조선시대 서당은 어떤 점이 비슷하고 또 어떤 점이 다른지" 궁금해했죠. "비슷한 점은 아이가 알아야 할 기초적인 내용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며, 아이가 사회생활을 제일 처음 배우는 곳이라는 점입니다. 또 정기적인 시험을 통해 학습 능력을 향상한다는 공통점도 있죠. 반면 한 명의 교사가 같은 내용을 여러 명의 학생에게 가르치는 초등학교와는 달리, 서당은 학동의 수준에 따라 훈장과 1대 1 학습이 가능했어요. 그래서 훈장과 학동 사이에 인격적 교류가 이뤄지기도 했죠. 또 서당은 단순한 지식 전달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더 중점을 두고 교육했어요."
서당 교육의 핵심
소중 학생기자단은 호현당 일일 학동이 돼 서당 교육을 체험해 봤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의 은혜가 같다'라는 뜻의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표현이 있을 만큼 스승에 대한 예를 중시했어요. 서당은 그런 스승에게 학문을 배우는 자리이니만큼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죠. 가장 먼저 할 일은 의관 정제입니다. 리안·수민 학생기자와 예준 학생기자가 정 훈장의 지도에 따라 전복을 입고, 머리에 복건을 썼죠. 요즘 학생이 학교에 갈 때 교복을 입는 것처럼, 조선시대에 서당을 갈 때도 최대한 단정하게 차려입는 게 중요했어요.

정명래 훈장의 도움을 받아 복건을 쓰고 있는 박리안 학생기자. 호현당에서는 복건·전복 등 전통 의상을 입고 수업을 받는다.
정 훈장의 지도에 따라 마당을 사뿐사뿐 걸어서 호현당 앞에 도착한 소중 학생기자단. 하지만 서당에 입장하기 위해 익혀야 할 예절은 이게 끝이 아닙니다. 정중하게 문을 여는 방법도 익혀야 하죠. 호현당의 문은 밀어서 여닫는 방식의 미닫이문이었는데요. 먼저 안에 있는 분에게 자신이 도착한 것을 알리기 위해 '똑똑' 노크하고, '제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어서 허락받은 뒤, 한쪽 문고리를 두 손으로 잡아서 조심스럽게 엽니다. 다른 쪽 문도 두 손으로 연 뒤, 방 안에 입장해서는 다시 두 손으로 번갈아 가며 양쪽 문을 닫죠.
공수 자세와 바르게 걷기, 정중하게 문을 여닫는 법까지 익힌 소중 학생기자단은 드디어 호현당 안에 입장해 정 훈장 앞에 섰어요. 무릎을 꿇고 방석 위에 앉아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은 뒤, 무릎 위에 손을 올려 공수 자세를 취하면 드디어 수업을 시작할 준비가 끝납니다. 스승을 대면하기까지 참 많은 준비가 필요하네요.

미닫이문을 여닫는 법을 배운 이예준 학생모델. 스승과 함께 공부하는 공간인 서당은 생활 규범을 배우는 곳이기도 했다.
서당에서 수업을 받을 때 '군자다움'을 유념해야 하는 이유는 서당이 단순히 학문만 알려주는 기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예법을 가르치고, 덕성을 함양해 행실이 점잖고 어질며 덕과 학식이 높은 군자(君子)가 되는 교육이 함께 이뤄졌죠. 일상에서 행동을 단정하게 하는 것이 곧 흐트러진 마음을 수습하는 방법으로 보았기 때문에 세수하고 머리 빗기, 옷 입기, 인사하고 절하기, 문안드리기, 글 배우기, 인사하기 등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바르게 하는 법을 익히는 것도 공부만큼이나 중요했어요. 그래서 서당별로 학동이 지켜야 할 학규가 존재했죠.
조선 중기의 문신 겸 성리학자 박세채는 자신이 운영한 남계서당에 적용되던 학규를 1689년 남긴 바 있는데요. 이를 통해 당시 서당을 다니던 학동들이 어떤 일상을 보냈는지 살펴봅시다.

박리안 학생기자(서울 태랑초 5)·이예준 학생모델(서울 도성초 4)·안수민 학생기자(서울 동호초 5·왼쪽부터)가 서울 중구 남산공원 호현당을 찾아 조선시대 서당 교육을 체험했다.
330여 년 전 서당에서 지키던 규칙임에도 오늘날 가정이나 학교에서 교육받는 기본예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어요.
추석맞이 큰절하는 법
민족 대명절인 추석은 평소 만날 기회가 드물었던 일가친척과 함께 차례·성묘 등을 함께 지내는 날인데요. 이럴 때일수록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예의를 갖춰야죠. 소중 학생기자단이 정명래 호현당 훈장에게 명절에 제례를 지내거나 웃어른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할 때 필요한 큰절하는 법을 배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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