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톤 허의 첫 에세이집에는 그가 부모의 반대를 꺾고 늦깎이로 문학 번역가가 돼 부커상 후보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이 담겼다. 부제는 ‘안톤 허의 내 갈 길 가는 에세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런 이력을 보면 번역가 안톤 허(42)는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상복 많은 사람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법관이 되길 바랐던 부모님의 뜻을 따라 법대에 갔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방황했고, 서른 살이 넘어 문학의 꿈을 좇아 대학원에 들어갔다. 이후 통역사·비문학 번역가·컴퓨터 프로그래머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전업 문학 번역가가 된 것은 36세.

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
지난 22일 서울 중구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안톤 허는 “부커상 후보에 오른 후 번역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그 전까지는 “책을 발굴하고, 번역 샘플을 만들고, 한국 출판사에 연락해서 번역권을 따내고, 해외 출판사에 책을 어필해서 출판 계약을 성사 시키는 일이 업무의 팔할이었다”면서다. 계약이 엎어지면 그 과정에 들인 시간과 돈과 노력은 허사가 된다. “한국 문학을 영어로 번역하는 전업 번역가가 다섯 명도 안 되는 이유”다.
번역가가 적으니, 번역서도 적다. 안톤 허는 “영미권에서 출판되는 한국 소설은 일 년에 많아야 열 권 남짓”이라고 했다. 영미권 독자들이 번역 문학을 읽지 않는 탓도 있지만, 문학 번역에 전념하기 어려운 척박한 시장 구조도 한몫 한다. 대표적인 것이 번역권 계약 관행이다.
“출판사 대부분이 번역가로부터 번역 저작권을 양수합니다. 이런 관행 때문에 책이 아무리 많이 팔려도 번역가에게 추가로 돌아가는 몫이 없어요. 문학 전문 번역가가 안 나오죠. 일 년에 영어로 나오는 책이 많아야 열 권인데, 노벨상을 기대하는 게 말이 되나요?”
부커상 후보 지명 이후 그는 에이전트를 고용했다. 이제 계약서 작성 등 부수 업무는 그의 소속사가 처리한다. 직접 일감을 따내지 않아도 번역 의뢰가 들어온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는 데 기쁨을 느낀다”고 했다. 그에게 ‘부커상 더블 롱리스트(1차 후보)’라는 영예를 안겨준 정보라의 『저주 토끼』와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 모두 그가 먼저 작가와 출판사에 “번역을 맡겨달라”고 제안해 해외 출판이 이뤄졌다.
“한영 번역은 한국 문학을 해외에 수출하는 일이에요. 해외 출판사에 제출할 샘플 번역과 기획안 제작 비용을 한국문학번역원이 지원해준다면 한국 문학을 해외에 알릴 기회가 늘어날 겁니다.” 가장 황당한 건 K팝이 잘 되니 K문학도 절로 잘 될 것이란 기대예요. (해외 팬들이) 블랙핑크 좋아한다고 황석영 소설 읽나요?”
안톤 허의 소설가 데뷔도 머지 않았다. 미국 대형 출판그룹 하퍼콜린스가 내년 여름 그의 영문 장편 소설을 내기로 했다. 이 ‘까칠한’ 번역가의 소설을 번역해줄 사람은 누굴까. “『저주 토끼』의 정보라 작가가 번역을 해준다고 했다”며 그는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