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이 열린 4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홍콩영화배우 주윤발(오른쪽) 부부가 레드카펫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배우 송강호가 호스트로 나서 손님 맞이를 하고, 배우 박은빈이 사상 첫 개막식 단독 사회를 맡았다.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가 4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열흘간 행사의 막을 올렸다.
이용관 전 이사장, 허문영 전 집행위원장이 내홍으로 잇따라 사퇴하며 생긴 초유의 공백을 어느 때보다 화려한 스타 게스트들이 메웠다. 5000여석 야외상영관 객석이 가득찼다. 남동철 수석프로그래머, 강승아 부집행위원장이 집행위원장 대행을 맡았다.
개막작 '한국이 싫어서' 20대女 '탈 한국' 담아
올해 영화제 포문을 연 개막작은 고아성 주연 영화 ‘한국이 싫어서’다. 장강명 작가의 동명 소설을 토대로, 28살 회사원 계나(고아성)가 뉴질랜드로 혈혈단신 이민을 간 여정을 담았다. 매일 인천과 서울 강남역을 오가는 출퇴근 길에 시달려도 계나에겐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한국에서 ‘경쟁력 없는’ 학벌‧집안 배경을 뒤로 한 채 오랜 남자친구와도 헤어지고 ‘탈(脫)조선’을 감행한 이유다.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이 열린 4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영화제의 호스트인 송강호 배우가 참석한 배우들을 맞이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20231004
각본을 겸한 장건재 감독(‘한여름의 판타지아’)은 소설 속 여성 화자를 계나의 내레이션으로 살려, 남성적 직장 문화, K장녀의 책임감 등 20대 여성의 고충을 미묘한 지점까지 짚어냈다. 원작의 호주를 뉴질랜드로 바꿔, 한국과 뉴질랜드의 삶이 번갈아 보이게 편집했다. 외국 생활도 희망 만으로 가득한 건 아니지만, 울적한 한국 생활에 비하면 화면부터 따스함이 감돈다. 2015년 원작 출간 이듬해 부산영화제 아시아프로젝트마켓에서 처음 프로젝트가 소개되며 제작이 성사된 작품이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촬영이 미뤄지면서 7년 만에 빛을 봤다.
4일 개막식 전 시사 후 간담회에선 한국의 어두운 면을 담은 영화를 왜 개막작에 선정했느냐는 외신 질문이 거듭 나왔다. 제목부터 도발적이기 때문이다. 이에 남 집행위원장 대행은 “특정 국가를 지칭하고 있지만, 보편적으로 젊은 세대가 가진 어려운 점을 잘 표현한 제목”이라면서 “영화에서 손쉽게 뭔가를 포기하거나 얻을 수도 있는 순간마다 계나는 자존을 지키기를 택한다. 우리 젊은 세대가 삶을 대하는 모습이 아닐까, 공감됐다”고 답변했다. “K콘텐트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시대에 판타지를 가질 수도 있다. 한국에 대해 좀 더 잘 알기 위해서는 어두운 면도 알고 밝은 면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라면서다.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에 선정된 영화 '한국이 싫어서'. 장강명 작가의 동명 소설을 토대로 배우 고아성(사진)이 주연, 장건재 감독이 각본, 연출을 겸했다.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장 감독은 영화화를 결심한 2014~2015년을 “‘헬조선’이 하나의 ‘밈’이 될 만큼 세월호‧강남역 (참사) 등을 겪으면서 ‘미투’ 운동 이후 한국 사회가 가장 크게 변한 시점”이라 돌이켰다. “한국 사회에 대한 피로감,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 등 다양한 의견을 경청하는 영화로 만들려 했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이 영화를 거치며 30대를 맞은 주연 고아성에게도 각별한 영화다. 지난달 갑작스레 천추골 골절 부상을 당한 그는 아쉽게 개막 행사에 참석하지 못했다.
올해 영화제에선 69개국 209편의 초청작이 상영된다. 아시아 신인 감독을 세계 무대에 발굴해온 경쟁 부문 ‘뉴커런츠’ 섹션에선 한국영화 ‘그 여름날의 거짓말’,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을 그린 일본 영화 ‘1923년 9월’ 등 10편이 경합을 벌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뤽 베송 등 해외 거장 감독도 신작을 들고 찾아온다. 재미교포 영화인들을 조명한 ‘코리안 디아스포라’ 특별전을 통해 한국계 할리우드 배우 존 조, 영화감독 저스틴 전, 정이삭 등도 개막식 레드카펫을 밟았다.
개막식 무대는 올초 별세한 배우 고(故) 윤정희의 추모 영상으로 시작됐다. 바이올리니스트인 딸 백진희씨의 라이브 연주와 함께다. 윤정희의 올해 한국영화공로상 수상 무대엔 이창동 감독이 시상자로 올랐다. 상을 대리 수상한 백진희씨는 "어머니는 매일 환상 세계와 현실의 만남을 겪으셨다. 이 감독의 영화 ‘시’처럼"이라면서 "지난 10여년은 중병과 싸워야 했지만 ‘시’와 여러분의 애정이 멀리 있는 어머니를 행복하게 했으리라 믿는다"고 불어로 소감을 밝혔다. 윤정희와 더불어 올초 작고한 일본 영화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의 추모 상영도 영화제 기간 마련됐다.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식이 열리는 4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 포토월에서 배우 저우룬파(주윤발)와 부인 재스민 탄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홍콩 영화 전성기를 풍미한 배우 저우룬파(주윤발)는 아시아영화인상 수상자로 선정되며 신작 '원 모어 챈스'를 들고 14년 만에 내한해 개막식 무대에 올랐다. 시상을 맡은 송강호는 "너무나 영광"이라면서 "영화팬의 마음속 우상, 슈퍼 히어로가 아닌 진짜 스크린속 영웅, 영화계 큰 형님이자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기억될 배우"라며 그를 소개했다.
배우 류더화, 감독 이안·지아장커·박찬욱 등의 축하 영상에 이어 무대에 오른 저우룬파는 "올해가 배우 데뷔 50년 되는 해다. 뒤돌아보면 어제 같기도 하다"면서 홍콩영화계와 아내, 부산영화제에 감사했다. "한국 팬, 긴 시간 응원과 사랑 주셔서 감사하다"면서 현장 관객들을 담은 '셀카'를 무대 위에서 찍기도 했다. "빨리, 빨리! 시간 없어요! 김치~!" 라는 익살맞은 한국말을 하면서다.
지난해 같은 상에 선정된 배우 량차오웨이(양조위)가 18년 만에 내한해 젊은 관객의 큰 호응을 얻은 바 있다. 올해 저우룬파가 ‘영웅본색’ 등 대표작이 담긴 특별전과 함께 그 열기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중화권 빅스타 배우 판빙빙도 한국 배우 이주영과 호흡 맞춘 영화 ‘녹야’로 처음 부산영화제 관객을 만난다.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이 열린 4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영화제 사회를 맡은 박은빈 배우가 입장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송봉근 기자 20231004
한편, 박은빈과 개막식 공동 사회로 예정됐던 배우 이제훈은 1일 허혈성 대장염 진단과 함께 응급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다. 부산영화제가 새로운 사회자 선정 대신 단독 사회를 택하면서 박은빈이 부산영화제 개막식 최초 단독 사회 기록을 세웠다. 부산영화제는 13일까지 열린다.
4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식에서 배우들이 레드카펫을 밟으며 입장하고 있다. 올해 영화제에는 개막작인 '한국이 싫어서'(장건재 감독)를 비롯해 69개국 209편이 초청돼 4개 극장 25개 스크린에서 상영된다. 뉴스1
부산=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