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베르트 하베크 독일 부총리 겸 경제 기후보호부 장관(왼쪽부터)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크리스티안 린드너 재무장관이 연방 헌법재판소의 올해와 내년 예산 위헌 결정에 따른 후속 조처를 발표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엄격한 재정 관리로 정평 난 독일이 600억 유로(약 86조원)에 달하는 예산이 구멍 날 상황에 처했다. 독일 연립정부는 지난해 '코로나19 긴급자금'으로 지정했다가 사용하지 않은 불용 예산을 올해 말부터 내년까지 쓰려고 했는데, 최근 독일 연방 헌법재판소가 "예산 전용은 위헌"이라고 판결했기 때문이다. 당장 돈줄이 막히면서 역성장에 발목이 잡힌 독일의 경제·산업이 더욱 위태로워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연정 흔들, 숄츠 리더십 시험대
독일 정부는 2009년부터 '부채 브레이크(제동 장치)'를 가동하고 있다. 정부의 재정 적자 규모를 2011년부터 줄여나가기 시작해 2016년부터는 국내총생산(GDP)의 0.35% 이내로 유지하는 게 원칙이다. 독일 재정의 건전성 유지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제도적 장치다. 그러나 2021년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감염병 대유행) 위기로 이 제도의 적용 예외가 결의됐다.
당초 독일 정부는 당시 불용 예산을 부족한 재정을 메우고, 청정에너지 신규 사업 투자 등에 활용하고자 했다. 하지만 최대 야당인 기독민주당·기독사회당 연합은 이런 예산 전용이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급기야 독일 헌재는 지난 15일 위헌 판결을 냈다.

정근영 디자이너
독일 헌재가 제동 건 이유는
헌재의 제동으로 독일 정부 입장에선 당장 올해와 내년 국가 재원으로 추진하려던 사업을 전부 중단해야 할 상황이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도 중단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숄츠 총리는 지난 24일 대국민 영상 담화를 통해 "28일 연방의회에 국정보고를 진행해 신속한 해결에 나서겠다"며 상황 수습에 나섰다. 린드너 재무장관은 "긴급하게 올해 예산과 관련해 사후적으로 부채 제동장치 적용 제외를 의결하고, 위헌 결정을 반영해 29일 추가경정예산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설상가상 연정에 대한 지지율마저 휘청이고 있다. 빌트가 실시한 주간 여론조사 결과 연립정부 지지율은 34%로 나타났다. 이는 2021년 연정이 처음 성립했을 당시에 비해 18%포인트 하락한 수치다. 제1당인 사민당 지지율은 16%, 연정 주요 파트너인 녹색당 지지율은 12%로 5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자유민주당은 6%에 그쳤다. 블룸버그는 "연정이 내놓는 해법이 숄츠 총리가 남은 임기를 무사히 완수할지, 나아가 2025년 이후 재집권에 성공할지 가르는 척도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독일 제조업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는 철강·엔지니어링 업체 티센크루프로의 공장 전경. 로이터=연합뉴스
"더 허리띠 졸라매야"
독일 공영방송 ZDF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다수 독일 국민은 "정부가 허리띠를 더 졸라매야 한다"는 데 동의를 표하고 있다. 응답자의 57%가 "예산 부족을 지출 삭감으로 충당해야 한다"고 답했고, 11%는 "세금 인상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또 23%는 "주 정부가 추가 부채를 부담해야 한다"고 밝혔다.
부채 제동 장치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비율 조정 등 손질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현행 헌법을 바꾸려면 연방의회 3분의 2 이상의 동의가 필요한데, 기민·기사 연합 등 야당의 반발이 거세 이마저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예산 공백과 정치권 분열에 올해 독일 경제 전망은 더 악화되고 있다. 지난 3분기 독일 경제가 0.1% 역성장한 상황에서 긴축 조치로 성장이 더 둔화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예측됐다. 이와 관련, 토마스 기첼 VP 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로이터통신에 "민간 소비나 투자가 갑자기 회복될 가능성은 작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