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을 무시하고 있다."
이런 구호를 앞세운 시위대가 7일(현지시간) 프랑스 전역에서 속출했다. 지난 5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우파 공화당 출신인 미셸 바르니에 전 농수산부장관을 새 총리에 임명한 데 따른 반발이 연일 계속되는 것이다.
특히 지난 총선에서 1위를 차지한 좌파 연합(NFP) 내 최대 세력이자 극좌 정당인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 등이 이번 시위를 주동하는 형국이다. 이날 파리 집회에 참석한 장 뤼크 멜랑숑 LFI 대표는 "긴 전투가 될 것"이라고 마크롱 정부에 선전포고했다.
르몽드 등에 따르면 "유일한 해결책은 탄핵", "바르니에 반대, 카스테트(NFP가 내세운 총리 후보) 찬성" 등이 적힌 플래카드를 든 시위대는 "마크롱의 쿠데타 반대", "국민은 무시를 당했다"는 등의 구호를 외쳤다.
바르니에 총리 임명 직후 "선거를 도둑 맞았다"며 항의했던 멜랑숑 대표도 이날 파리 행진에 참석했다. 그는 "긴 전투에 임할 것을 촉구한다"며 "민주주의는 승리를 인정할 줄 아는 기술이자 패배를 받아들이는 겸손함"이라고 마크롱 정부의 결정을 질타했다.
프랑스 여론조사 기관 엘라브가 지난 6일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74%는 "마크롱 대통령이 총선 결과를 무시했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게다가 이 중 55%는 "대통령이 선거 결과를 훔쳤다고 믿는다"고 밝혔다.
바르니에는 여소야대 국면 돌파용?
이런 상황에서 집권당인 앙상블(163석)과 바르니에 총리가 속한 공화당을 포함한 우파(68석)의 의석수를 보면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하지만 '물과 불'처럼 절대 함께 할 수 없는 NFP와 RN의 관계를 고려하면 나쁘지 않은 선택지란 분석도 나온다. 마크롱 정부 내에선 총선에서 이긴 좌파 추천 후보를 총리에 앉힐 경우 국정 운영에 발목이 잡힐 것이란 우려도 있었다.
또 마크롱 대통령은 자신과 뜻을 함께했던 공화당 출신 가브리엘 아탈 전 총리의 역할을 신임 총리가 이어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AFP 통신은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바르니에는 '마크롱과 어울리는 인물'이기 때문에 의회에서 즉시 퇴출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향후 동거 정부의 주도권은 마크롱 대통령이 쥘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일각에선 바르니에 총리가 하원의 '정부 불신임안' 투표를 견딜 만한 인물로 바라본다.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를 혼합한 이원집정부제인 프랑스에선 헌법상 대통령이 원하는 인물을 총리에 앉힐 수 있다. 임명 전 의회의 인사청문회가 열리는 한국과 달리 내각 구성 후 의회가 불신임 투표에 붙일 수 있다. 그런 만큼 역대 세 정부에서 장관을 지내는 등 오랜 정치 이력으로 노련함을 갖춘 바르니에 총리가 버틸 수 있다는 풀이가 나온다.
1958년 이후 프랑스 제5공화국 체제에서 역대 최고령인 바르니에 총리는 73년 사부아 지역의회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뒤 78년 하원 의원에 첫 당선됐다. 프랑수아 미테랑 정부에서 환경장관(93~95년), 자크 시라크 정부에서 외무장관(2004~2005년), 니콜라 사르코지 정부에서 농수산부장관(2007~2009년)을 지냈다. 2016년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논의할 때 유럽연합(EU) 측 협상 대표로 활약해 '미스터 브렉시트'란 별명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