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12월 10일 서독 함보른 광산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일행을 마중 나온 파독 광부와 간호사 등이 태극기를 흔들며 기다리고 있다. 중앙포토
"국가가 부족하고 내가 부족해 여러분이 이 먼 타지까지 나와 고생이 많습니다.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들에게만큼은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열심히 합시다. 나도 열심히…."
1964년 12월 10일 서독 함보른 탄광. 박정희 대통령은 육영수 여사와 함께 파독 광부·간호사를 만나 이렇게 말하며 눈물을 쏟았다. 박 대통령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자 장내는 순식간에 울음바다가 됐다.
박 대통령 내외가 60년 전 타국에서 "후손을 위해 번영의 터전이라도 닦자"며 함께 부둥켜안고 통곡했던 파독 광부·간호사를 위해 전북특별자치도가 팔을 걷어붙였다.
김관영 전북특별자치도지사가 지난 6일 독일 베를린 한인 성당에서 열린 간담회에 참석한 파독 광부·간호사 150여명에게 큰절을 올리고 있다. 사진 전북특별자치도
전북자치도는 10일 "6·25 전쟁 이후 보릿고개를 겪던 한국이 '경제 기적'을 이루는 데 공헌한 파독 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를 예우·지원하는 대책을 세울 계획"이라며 "전북 출신 파독 근로자를 고향으로 초청하거나 정착을 돕겠다"고 밝혔다. 이는 김관영 지사가 이끄는 전북자치도 출장단이 지난 6일 독일 베를린 한인 성당에서 파독 광부·간호사 초청 간담회를 연 게 계기가 됐다. 출장단은 국제 교류와 미래 먹거리 산업(농생명·수소·탄소) 협력 강화를 위해 지난 2일부터 8일까지 독일·네덜란드를 다녀왔다.
출장단은 이번 간담회에서 60~70년대 외화를 벌기 위해 이역만리로 떠난 광부·간호사 150여명(전북 출신 54명)을 만났다. 꽃다운 청춘에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낯선 땅에서 몸부림쳤던 젊은이들은 어느덧 70~80대 백발 노인이 됐다.
도에 따르면 반세기 전 독일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광부는 섭씨 35도가 넘는 지하 1000m 갱도에서 고역에 시달렸고, 간호사는 파견 초기 독일어가 서툴러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았다고 한다.
김관영 전북특별자치도지사가 지난 6일 독일 베를린 한인 성당에서 열린 파독 광부·간호사 초청 간담회에서 파독 광부 출신 교민과 부둥켜안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전북특별자치도
이날 파독 근로자들은 전북자치도가 준비한 판소리 공연과 서예 퍼포먼스, 한지 공예 체험 등을 즐기면서 고향의 정을 나눴다. 군산 출신 채수웅(78)씨는 "25살이던 1971년 어려운 가정환경을 이겨내려고 무작정 독일에 왔다"며 "하루에 8시간씩 석탄을 캐면서 고생을 정말 많이 했다"고 했다. 전주가 고향인 김광숙(78·여)씨는 "1970년 간호사로 파견돼 베를린에서 청춘을 보냈다"며 "그 시절 모두가 힘들고 어려웠지만, 가족과 조국에 도움이 됐다는 자긍심으로 살아왔다"고 전했다.
김 지사는 간담회에 참석한 파독 광부·간호사에게 큰절을 올린 뒤 "여기 계신 분들의 희생은 대한민국 근대화의 주춧돌이 됐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그러면서 "오직 가족과 조국을 위해 지하 탄광과 병원에서 청춘을 바친 파독 근로자의 헌신이 잊히지 않도록 앞장서겠다"고 했다.
김관영 지사가 이끄는 전북특별자치도 출장단이 지난 6일 독일 베를린 한인 성당에서 파독 광부·간호사 150여명을 초정한 가운데 간담회와 판소리 공연 등을 마친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전북특별자치도
전북자치도의회는 지난 5월 임승식 도의원(정읍1)이 대표 발의한 '파독 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 지원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다. 파독 근로자 중 전북 출신이거나 전북에 주소를 둔 사람을 대상으로 ▶전북 정착에 필요한 교육·상담 ▶파독 근로자 관련 기관·단체와 연계 ▶도 설치·관리 시설 사용료 감면 등을 담고 있다. 현재 도내에 거주하는 파독 근로자는 50명(광부 43명, 간호사 3명, 간호조무사 4명)이다.
이와 함께 도지사는 파독 근로자 노고와 희생을 기념하기 위한 시설 건립과 기념일 지정, 역사적 자료 수집·보존·관리·전시·조사·연구 등의 사업을 할 수 있다. 해당 사업을 하는 법인·단체에 보조금을 지원할 수 있는 규정도 넣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4일 서울 광진구 그랜드 워커힐 서울에서 열린 파독 근로 60주년 기념 오찬에 앞서 파독 근로자의 독일 현장 모습을 담은 사진을 관람하고 있다. 연합뉴스
앞서 국회는 2020년 6월 파독 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에 대한 지원 및 기념사업에 관한 법률(파독광부간호사법)을 제정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따르면 1963~1977년 정부가 외화 획득과 실업률 감소를 기대하며 독일에 파견한 광부는 7936명, 간호사는 1만1057명 등 총 1만8993명이었다.
이들은 1965~1975년 1억153만 달러를 고국에 부쳤다. 1965~1967년 송금액은 당시 한국 총 수출액 대비 각각 1.6%, 1.9%, 1.8%에 달했다. 위원회는 2008년 이런 내용을 발표하며 "국제 수지 개선과 경제 성장에 상당히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4일 독일 파견 근로 60주년 기념식에서 "여러분의 삶이 곧 우리 현대사"라고 말했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