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강 처녀' 노래비 세웠으니 가문의 영광? 1억 물어낼 판 왜 [이용해 변호사의 엔터Law 이슈]

사천시는 2005년 삼천포대교공원에 고 반야월이 작사한 '삼천포 아가씨'의 노래비를 설치했다. 사진 연합뉴스

사천시는 2005년 삼천포대교공원에 고 반야월이 작사한 '삼천포 아가씨'의 노래비를 설치했다. 사진 연합뉴스

 
국내의 지역 명소로 유명한 곳을 가면, 그 지역을 다룬 대중가요의 노랫말이 적힌 노래비를 흔히 볼 수 있다. 2018년 발간된 ‘한국의 노래비’라는 책에 의하면 전국 각지에 세워진 노래비가 667개나 된다고 하고, 기사들에 의하면 이후에도 많은 노래비가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노래비에는 통상 가사 전체가 수록되고, 대개 열린 공간에 설치되어 있으므로 사실상 아무런 제한 없이 대중들에게 무한정 노출된다.

노래비를 설치하는 지자체 등 공공기관들은 공익 목적임을 이유로 그 노랫말 이용에 관하여 별도의 허락을 받지 않거나, 허락을 받더라도 사용료를 지급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원칙대로라면 노래비에 가사를 기재하는 행위는 저작물을 ‘복제’하는 것이므로, 저작자인 작사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작사가가 가사를 한국음악저작권협회와 같은 신탁단체에 신탁했다면 신탁단체의 허락이 필요하다.

대법원은 최근 ‘소양강 처녀’, ‘삼천포 아가씨’, ‘울고 넘는 박달재’ 등으로 유명한 작사가 고(故) 반야월의 유족과 신탁단체가 제기한 소송에서 노래비를 세우는 지차제들의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

고인의 3녀 박모씨는 2016년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 무단으로 ‘소양강 처녀’ 노래비에 사용했다”며 ‘소양강 처녀’ 노래비를 세운 춘천시를 상대로 1억4250만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이외에도 고인이 작사한 노래로 노래비를 세운 경남 사천시(‘삼천포 아가씨’ 노래비)와 태안군(‘만리포 사랑’ 노래비), 제천시(‘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비), 서울 금천구·성북구(‘단장의 미아리 고개’ 노래비), 한국수자원공사(물 문화관 앞 난간에 ‘소양강 처녀’ 가사를 적었다)를 상대로 총 1억425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지난 7월 대법 판결 선고에선 지자체의 손을 들어줬던 원심을 일부 파기환송했다. 사건에서 일부 지자체는 작사가, 작곡가, 가수 모두의 동의를 받기 위해 노력하였다는 취지로 주장했으나, 대법은 “가사가 이미 신탁단체에 신탁된 상태에서 지자체가 신탁단체의 허락을 받지 않았다면 정당한 이용임을 주장할 수 없다”면서 허락의 주체를 명확히 했다. 신탁단체가 승소한 금원은 결국 유족에게도 분배될 것이므로, 창작자 측을 보호하는 취지로 볼 수 있다.


가사가 적힌 노래비를 공공장소에 설치할 때는 저작자(신탁단체)의 허락이 반드시 필요하다. [AI가 만든 이미지]

가사가 적힌 노래비를 공공장소에 설치할 때는 저작자(신탁단체)의 허락이 반드시 필요하다. [AI가 만든 이미지]

 
또 ‘공정 이용’의 근거를 명확히 하도록 했다. 공정 이용은 원저작물의 생산적, 변형적 이용이 기존 원작과 다른 새로운 창작을 유도하므로 이를 허용하여 문화의 향상과 발전을 이루고자 하는 것인데, 노래비에는 노랫말이 아무런 변형 없이 그대로 복제될 뿐이어서 다른 복제와 달리 취급할 이유가 없다. 노래비는 설치 기간이나 이용할 수 있는 자의 제한도 없이 노출되므로, 오히려 저작자의 이익을 보호할 필요는 더 크다고도 볼 수 있다.

위 판결은 저작권에 대한 우리 사회의 달라진 인식도 반영하고 있다. 이제는 지역 홍보 같은 추상적인 공익이 창작자의 권익 보호보다 우월한 공익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노래비와 같은 상징물이 제작되었다 하여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며 감지덕지하는 시대도 아니다. ‘홍보 되면 좋은 거 아니냐’는 식의 발상은 더는 발 붙이기 힘들다.

지난 1월엔 방탄소년단 소속사 하이브가 지자체들에 ‘동의 없이 활용한 지식재산권이니 방탄소년단 조형물을 철거해 달라’는 공문을 보냈다. 이에 따라 강원 삼척의 맹방 해변, 부산 남구 오륙도 등의 포토존이 철거됐다.

합의 없이는 노래비와 같은 조형물 건립을 할 수 없고, 저작물 이용에는 사용료를 지급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세상이다. 이렇게 우리의 저작권 감수성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필자소개

이용해 변호사는 서울대 영어영문과를 졸업하고 20여 년간 SBS PD와 제작사 대표로서 ‘좋은 친구들’, ‘이홍렬 쇼’, ‘불새’, ‘행진’ 등 다수의 인기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후 법무법인 화우의 파트너 변호사 및 미디어 엔터테인먼트 팀장으로서 넷플릭스·아마존스튜디오·JTBC스튜디오 등의 프로덕션 법률 및 자문 업무를 수행해왔다. 현재 콘텐트 기업들에 법률 자문과 경영 컨설팅을 제공하는 YH&CO의 대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