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왜구는 동아시아 해역 전체를 무대로 한 복합적 현상이었고 약탈보다 교역이 중심 사업이었다. 중국 동남해안이 중심 무대였고 인적 구성도 일본인보다 중국인이 더 많았다. (3 대 7 비율로 본 당시 기록들이 있다.) 기지를 일본에 두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14세기 경험의 연장선 위에서 “왜구”란 말이 계속해서 쓰인 것이다.
왜 가정제 때만(1521-1567) 왜구가 많았을까?
조사된 170년 기간 중 4분의 1 남짓한 한 황제의 재위 기간에 90% 이상의 기사가 집중된 데는 그 황제의 정책에 큰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다음 황제 목종이 즉위 직후 해금(海禁)을 완화하는 ‘융경개관(隆慶開關)’을 시행하자 왜구 문제가 크게 줄어들었다.
53명 왜구가 모두 날아오는 화살을 손으로 잡아채는 무예의 고수였다느니, 민간인을 일절 침해하지 않았다느니, 신기한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공격해 온 목적이 무엇인지 등 많은 것이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가정왜란에 관한 기록이 어지러운 큰 원인이 정치가 어지러운 데 있었다. 관계자들이 책임 회피를 위해 아무렇게나 지어낸 얘기들이 여과 없이 기록에 남은 것 같다. 가정왜란 몇 해 전의 ‘경술지변(庚戌之變)’에서도 그 시대 명나라 정치의 어지러움을 알아볼 수 있다.
오랑캐는 평화를 원하는데, 명나라 조정은?
알탄 칸(1507-1582)은 1540년경 타타르부를 이끌기 시작하면서부터 호시(互市) 개설을 청원했다. 가정제가 1541년의 첫 청원을 무시하자 이듬해 알탄 칸이 다시 보낸 사절을 지방관들이 바로 처형했다. 나중에 보고를 받은 황제가 그 관리들을 포상하자 옹만달(翁萬達)이 잘못된 조치라고 항의했으나 그 자신이 견책당했다. 변경의 장수와 관리들은 몽골 사절 잡아 죽이기에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1570년 명나라와 알탄 칸의 화친은 멜로드라마틱한 사연으로 전해진다. 알탄 칸의 부인이 무척 사랑하는 손자가 개인적 문제로 (약혼자의 혼처를 바꾸는 데 불만을 품고) 명나라로 달아났는데 현명한 명나라 지방관이 그를 보호하며 황제에게 주청하여 알탄 칸 집안의 화해를 도와주면서 신뢰를 쌓게 했다고 한다.
이런 사연에는 별 의미가 없다고 나는 본다. 알탄 칸은 시종일관 평화로운 교역 관계를 원했고 문제 많던 황제가 없어진 덕분에 평화가 온 것일 뿐이다. (중국 황제를 대개 시호로 표시하지만 가정제만은 연호로 부른다. “세종”이란 시호가 너무 아깝다.) 명나라가 그토록 비협조적으로 나갔는데도 알탄 칸의 영도력이 오래 유지된 것이 명나라에게 천행이었다.
권력만 생각하고 책임은 생각 않는 황제
가정제가 신하들의 권유를 물리치고 자기 생부의 추존(追尊)을 고집한 것은 얄팍한 효심 때문이었다. 생부의 권위를 더 올리고 생모가 태후 자리에 오르게 (양모가 될 기존 태후 대신) 하고 싶었던 것이다. 대학사 양정화(楊廷和)를 위시한 조정 주류는 이에 반대하다가 황제의 배척을 받고, 황제를 지지하는 총신들이 요직을 차지했다.
그 폐단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북로(北虜) 대책을 보자. 알탄 칸의 일관된 호시 개설 청원을 무시한 것은 온건한 대책을 주장하는 주류 신하들에 대한 황제의 불신 때문이었다. 이 틈새를 간신들이 파고들어 적대적 정책으로 황제의 환심을 사다가 막상 사태가 터지자 책임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된 것이었다.
‘준비 안 된 정권’의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낸 사례다. 칼자루를 쥔 권력자가 당장은 매사를 뜻대로 몰고 갈 수 있어도 그 결과는 누가 감당하나? 서연(書筵: 황제의 경연과 같은 틀로 황태자의 학습과 교육을 행하는 제도)을 통해 황제의 권한만이 아니라 그 책임까지 몸에 익힌 황제라면 가정제 같은 난장판은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명나라의 ‘정치 실패’ 속에 포르투갈이 얻은 마카오
조정의 대책이 없는 상황에서 시장 논리가 현장을 지배했다. 남왜 문제에는 해외교역이 걸려 있었다. 해금 정책 아래서도 해외교역은 꾸준히 자라났는데, 조정의 공식적 대응이 해금 정책으로 막혀 있는 상황에서 지방관들이 교역에 이해관계를 가진 지방 민간세력과 결탁하는 풍조가 일어났다.
명말청초의 문학작품에 아내 왕취교(王翠翹)와 함께 많이 등장한 서해(徐海)도 가정제 때 해적이었다. 서해는 중국 동남해안에 큰 세력을 이루고 있다가 1556년 총독 호종헌(胡宗憲)의 초무를 받았으나 살해되고 왕취교는 강물에 몸을 던졌다. 또 하나 거물 해적 왕직(汪直)도 호종헌의 초무에 응하다가 1559년 처형당했다.
포르투갈인이 마카오에 기지를 확보한 것도 가정 연간이었다. 포르투갈인은 1513년 중국 연안에 도착하고 1517년 사절을 보내고 교역 활동을 시작했으나 난폭한 행동 때문에 추방당했다. 그후 불편한 관계가 계속되다가 1554년 광주(廣州)의 지방관과 지속적 교역을 위한 협약을 맺고 1557년 마카오 임대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도 뇌물이 오고간 흔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