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개봉한 영화 '더 킬러스'는 어니스트 헤밍웨이 동명 단편을 4명의 감독이 저마다 해석한 단편 4편을 모은 앤솔로지다. 사진은 김종관 감독이 연출한 '변신'.사진 스튜디오빌
미국 어느 교외 식당에 괴한 2인조가 들이닥친다. 이 식당 단골손님을 살해하기 위해서인데, 그들은 별 계획도 없이 하염없이 기다린다. 살해 타깃이 된 사람 역시 자포자기한 듯 집에 틀어박혀 도망칠 엄두도 안 낸다.
미국 대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의 단편소설 ‘살인자들’(1927)이다. 이 소설이 한국 앤솔로지 영화 ‘더 킬러스’(23일 개봉)로 재탄생했다.
이명세(‘인정사정 볼 것 없다’)‧장항준(‘리바운드’)‧노덕(‘특종: 량첸살인기’)‧김종관(‘조제’) 등 감독 4인이 원작 소설을 저마다 달리 연출한 4색 단편을 모았다. 한국영화가 영미 문학 원작을 달리 해석해 내놓은 건 첫 시도다. 극장 개봉 후 신인감독 윤유경‧조성환이 각각 연출한 단편 2편까지 총 6편 확장판을 VOD 및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로 출시할 계획이다.
6편의 단편 모두 심은경이 출연한다는 점에서, 가수 겸 배우 아이유 중심으로 감독 4인이 참여한 넷플릭스 앤솔로지 영화 ‘페르소나’(2019)와도 닮은꼴 기획이다. 심은경은 일본에서 주로 활동하다 ‘더 킬러스’로 6년 만에 한국영화에 복귀했다.
팬데믹 이후 침체한 영화계에서 감독들이 궁리한 자구책이 영화에 담겼다. 18일 언론 시사 후 간담회에서, 총괄 크리에이터 이명세 감독은 “지속가능한 작품 활동을 위해 창작과 자본이 윈윈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꿈꿨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알 카포네 무법시대 사회상 담은 하드보일드 원작
원작은 금주령이 내렸던 1920년대, 갱들의 무법지대였던 시카고의 사회상(악명 높은 알 카포네의 활동 시기)을 17쪽 분량(『헤밍웨이 단편선1』, 민음사)에 압축했다. 죽을 운명인 걸 뻔히 알면서도 옴짝달싹 않는 답답한 시대 상황을, 헤밍웨이가 자전적 캐릭터인 소년 닉을 통해 표현했다. 그가 어느 날 점심 식사 직전 단숨에 썼다고 전해진다.
미국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1942년). [사진제공=위키피디아]
헤밍웨이 소설의 하드보일드한 색채가 고루 담겼다는 평가다. 러시아 거장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1956년작, 할리우드 액션 대가 돈 시겔의 1964년작 등 수차례 영화화된 소설이다.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가 이 단편에 영감 받아 대표작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1942)을 그렸다는 설이 있다.
‘더 킬러스’는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이미지와 심은경, 흑백 영상을 섞어 쓴 구성이 각 단편을 통일성 있게 엮어주는 연결고리가 됐다.
살인청부도 하청이 되나요…군산 국밥집 특급 살인마
감독 4인 4색 앤솔로지 영화 '더 킬러스' 중 노덕 감독이 연출한 '업자들'은 헤밍웨이 단편 '살인자들'을 토대로 살인청부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문 하청 킬러들을 통해 들통난 중국 실화에 영감받아 만들었다. 사진 스튜디오빌
가장 몰입도 높은 단편 ‘업자들’은 선금 3억원짜리 음대 교수 청부살인 의뢰가 하청의 하청의 하청을 거쳐 초짜 킬러 3인방의 보수 300만원짜리 소동극으로 둔갑하는 블랙 코미디. 최근 넷플릭스 외계인 SF ‘글리치’ 등 색다른 상상을 펼쳐온 노덕 감독이 중국 실제 범죄사건에 영감 받아 만든 작품이다.
노 감독은 “원작에서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지점을 영화적으로 다뤘다. 짧은 시간 안에 여러 인물을 다루는 앙상블에 도전했다”고 말했다. 극 중 3인방은 ‘더 킬러스’ 시동을 건 이명세 감독 데뷔작 ‘개그맨’(1988)을 오마주했다. 캐릭터 이름 뿐 아니라, 이 감독의 둘째 아들인 배우 이반석도 캐스팅했다.
영화 '더 킬러스' 중 장항준 감독이 연출한 단편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 10.26 사건당일 시대 분위기를 군산 어느 부둣가 국밥집에서 벌어진 사건에 빗대어 그렸다. 사진 스튜디오빌
장항준 감독의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는 1979년 10월 26일(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일)을 배경으로, 한밤중 군산 부둣가 국밥집에서 얼굴도 모르는 특급 살인마를 기다리는 사내들의 스릴러를 시대상과 엮어냈다. 반전 영화 ‘기억의 밤’(2017) 감독다운 허를 찌르는 결말이다. “우리 역사의 엄청난 변곡점이 있던 밤을 작은 어촌 선술집 사건에 빗대어 스릴러‧액션의 틀에서 풀어봤다”고 그는 설명했다.
팔색조 뮤즈 심은경…"그의 연기 영화 반경 넓혔다"
영화 '더 킬러스' 중 이명세 감독이 연출한 '무성영화'는 (뒷줄 오른쪽부터)배우 심은경, 고창석, 김금순이 채플린 시대의 영화 본질로 돌아간 연기를 펼친다. 사진 스튜디오빌
김종관 감독의 ‘변신’은 등에 칼이 꽂힌 채 바에서 깨어난 남자가 등장하는 뱀파이어물. 수상한 손님과 바텐더의 핏빛 칵테일 쇼가 예측불허한 전개로 펼쳐진다. ‘더 킬러스’ 중 심은경의 캐릭터 변신이 가장 신선하다. 차기작 ‘낮과 밤은 서로에게’(가제)에서도 그와 작업하는 김 감독은 “심은경의 연기가 내 영화 반경을 넓혔다”고 말했다.
극장판 대미를 장식하는 ‘무성영화’는 ‘비주얼리스트’ 이명세 감독이 원작 소설의 부조리한 식당 분위기를 난민‧추방자들의 가상 지하세계 ‘디아스포라 시티’에 충실히 옮겨냈다. 찰리 채플린, 버스터 키튼, 자크 타티 시대의 몸짓과 사운드 등 영화 매체의 본질을 되짚은 고전적 작품이다. “(영화다운) 영화가 사라지고 있는 건 아닌가” 라는 그의 고민과 갈증을 풀어냈다.
영화 '더 킬러스' 중 단편 '변신'에는 김종관 감독 전작 '아무도 없는 곳'에도 출연한 배우 연우진이 주연을 맡았다. 이를 비롯해 각 단편에서 감독들의 전작에 함께한 배우들의 '인맥 출연'을 찾는 것도 보는 재미를 더한다. 사진 스튜디오빌
확장판에 수록될 윤유경 감독의 ‘언 땅에 사과심기’는 우주로 간 신구 킬러를, 조성환 감독의 ‘인져리 타임’은 자신의 상처를 헤집어 초능력을 발휘하는 이들을 담았다. '더 킬러스'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뉴욕아시아영화제‧시체스영화제 등에 초청돼 주목받았다.
서울예대 60주년 기념작 "고착화한 한국영화, 용기 있는 시도"
김종관 감독(왼쪽부터), 노덕 감독, 배우 심은경, 장항준 감독, 이명세 감독이 18일 서울 광진구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점에서 열린 영화 '더 킬러스' 언론시사회 및 기자간담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영화는 2년 전 서울예술대학교 60주년을 기념하는 과정에서 서울예대 출신 감독들이 한국영화계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의기투합한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최근 박상영 작가의 동명 단편소설집을 토대로 21일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로 공개된 ‘대도시의 사랑법’(감독 허진호‧홍지영‧손태겸‧김세인)도 올해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40주년을 기념한 동문 프로젝트다. 장항준 감독은 ‘더 킬러스’에 대해 “요새 한국영화가 고착화됐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데, 새롭고 용기 있는 시도에 참여하게 돼 자부심이 있다”고 말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