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미국식 입학사정관제를 좇아 다양한 경험과 활동에 대한 정성평가를 바람직한 모델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정성평가의 대상이 되는 자기소개서, 추천서 등을 (유학생이 아닌 자국민에게) 보편적으로 요구하는 나라는 미국, 영국, 아일랜드 정도이고 그밖에 캐나다와 싱가포르의 상당수 대학에서 요구한다. 즉 입학사정관제는 보편적인 제도가 아니다. 하지만 유독 의대 입시의 경우에는 서류, 면접 등 입학사정관제와 유사한 정성평가 요소가 작용하는 나라가 꽤 있다. 특히 미국과 캐나다는 의대가 대학원 과정인데, 온갖 종류의 전형요소가 총체적으로 동원된다.
의사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인기 직업이어서, 한국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대체로 의대에 진학하기 어렵다. 이 점은 심지어 소득격차가 적고 계층이동이 활발한 북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대학서열은 별로 없다 할지라도 전공서열은 엄존하며, 의대는 가장 합격선이 높은 그룹에 속한다.
예를 들어 노르웨이 의대는 전원 내신성적으로, 핀란드 의대는 전원 대입시험으로 성적순 선발한다. 스웨덴의 의대의 경우 대략 1/3은 내신성적으로, 1/3은 대입시험 성적으로 선발하고 나머지 1/3은 대학 재량으로 선발하는데 여기에는 서류, 면접, 별도의 적성고사 등이 반영된다. 덴마크 의대의 경우 내신성적의 학교별 편차를 표준화시험으로 보정하고 대체로 이 성적으로 선발하지만 일부 정원은 스웨덴처럼 다양한 전형요소를 활용한다.
프랑스, 의대 입학 쉽지만 진급 어려워
독일의 경우 모든 대학 학과들의 60%는 일정 점수만 되면 입학시키지만 의대를 포함한 나머지 40%의 학과들은 ‘대체로 성적순’으로 선발한다. 의대의 경우 입학정원의 30%는 아비투어 성적(내신과 대입시험을 2:1로 합산) 순서로 선발하고, 60%는 대학 자율인데 여기에는 아비투어 성적과 더불어 앞에서 언급한 적성고사나 면접, 봉사 등이 반영된다.
예전에는 정원의 20%를 대기입학이라는 특이한 방식으로 채웠다. 예를 들어 의대 대기자로 등록해 놓고 몇 년이고 기다리면 입학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것은 독일에서 재수가 금지되어 있다는 특이한 사정이 반영된 것이었다. 한번 받은 아비투어 성적을 변경할 방법이 없으므로 다시 기회를 준다는 취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2020년에 의대 대기입학은 폐지되었다. 그 대신 정원의 10%를 적성고사만으로 선발한다. 이와 함께 독일 16개주 가운데 8개 주에서 정원의 5~10%를 농촌지역 10년 근무를 조건으로 선발하기 시작하면서 아비투어 점수의 문턱을 낮춰놓았다.
네덜란드도 독일과 유사하게 인기학과는 ‘대체로 성적순’으로 선발하는데, 의대의 경우 사회적 형평성을 고려하여 정원의 일부를 추첨으로 선발했다. 단 성적이 높을수록 당첨 확률이 높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추첨제는 2017년에 폐지되었다가 2023년에 일부 의대에서 부활했다.
선진국의 의대 입시를 종합해 보면 성적만으로 진학할 수 있는 경우도 많지만, 여타 전공에 비해 서류·면접·적성고사 등 다양한 전형요소를 활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고 심지어 추첨을 하기도 한다. 나라마다 다양한 방향으로 진화시켜 오면서 ‘적합성’와 ‘형평성’ 사이에서 고민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