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반도체는 中수출 '바늘구멍'인데…정부 전략, 한·일 희비 갈랐다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 장관. UPI=연합뉴스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 장관. UPI=연합뉴스

미국이 중국으로 향하는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첨단 반도체 장비 수출길을 완전히 막았다. 한국 기업들이 중국에 구형 HBM과 반도체 장비를 팔 수 없게 되면서 한국 반도체 산업이 크게 위축될 위기다. 미·중의 첨단기술 패권 경쟁의 범주가 갈수록 확대되는 가운데, 한국이 기정학(技政學)적 전략 경쟁에서 일본·대만에 비해 뒤쳐져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 상무부 산업안보국(BIS)은 지난 2일(현지시간) 수출통제 대상 종목에 HBM 제품을 공식적으로 추가했다. 상무부는 “현재 생산되는 모든 HBM이 제재 대상이 된다”며 중국의 HBM 공급로를 완전히 차단했다. 미국 기업이 만든 HBM은 물론, 제3국이 만든 HBM도 미국의 기술이 쓰였다면 수출 통제 대상이라, 수출을 하려면 미국 정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상무부는 중국 기업 140곳을 수출 제한 기업으로 명시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2021년 미 워싱턴DC 백악관에서 반도체, 배터리, 희토류, 바이오의약품 등 4개 품목에 대한 공급망 조사를 지시하는 행정명령 14017호에 서명하면서 반도체를 들어 보이고 있다. AFP=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2021년 미 워싱턴DC 백악관에서 반도체, 배터리, 희토류, 바이오의약품 등 4개 품목에 대한 공급망 조사를 지시하는 행정명령 14017호에 서명하면서 반도체를 들어 보이고 있다. AFP=연합뉴스

국내 반도체 업계는 “마침내 올 것이 왔다”는 분위기다. 미국이 엔비디아의 AI 가속기에 대해 중국 수출을 차단하면서 HBM도 제재 대상에 포함될 것이란 전망이 많았다. 그러나 최신 HBM으로 제한하지 않고 모든 HBM의 중국 수출을 금지한 데다, 한국 기업들의 주된 매출원인 D램 등 일반 메모리 반도체에선 중국 기업들의 저가 경쟁을 미국이 방관하면서 한국 기업들의 충격이 크다. 

삼성전자만 해도 상반기 중국 매출액이 32조3452억원으로 지난해 상반기(17조8080억) 대비 2배 수준이며, 대부분이 반도체 수출에서 나왔다. 올 상반기 삼성의 중국 매출은 반도체 호황기였던 2022년 기록을 넘어서며 부진에 빠진 삼성 반도체 실적을 지탱했다. 그런데 이 길이 앞으로 막힌다.

HBM 생산량 상당 부분을 미국 엔비디아에 공급하는 SK하이닉스 역시 올해 상반기 중국에서만 8조6061억원의 매출을 거두며 전년 동기 대비 2배 이상 늘었다. 제재를 앞둔 중국이 한국산 메모리 칩 사재기에 나섰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HBM 중국 수출 비중이 실제보다 다소 과장됐다는 입장이지만, 익명을 요구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실제 우회 경로로 중국에 흘러 들어간 구형 HBM 관련 매출이 무시 못 할 수준”이라 말했다.


김영희 디자이너

김영희 디자이너

 
K반도체 타격, 손발 묶인채 중국과 저가 경쟁

중국 안후이성 허페이에 위치한 CXMT의 반도체 공장. 사진 CXMT

중국 안후이성 허페이에 위치한 CXMT의 반도체 공장. 사진 CXMT

 이번 미국의 수출 제한 조치로 한국 반도체 산업은 이중고에 시달리게 됐다. 한국 기업의 중국 수출길은 막힌 상태로, 중국 메모리 업체들이 저가로 밀어내기(덤핑)하는 구형 메모리 제품과 경쟁해야 한다. 미국 상무부는 이번 발표에서 삼성전자·SK하이닉스를 거세게 추격 중인 중국 최대 D램 기업 창신메모리(CXMT)를 제재 대상에 포함하지 않았다. 제재로 DDR5 등 첨단 D램 제품을 개발하기는 어려워졌지만 기존 범용 시장에서의 물량 쏟아내기를 당분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반도체 업계에선 미국이 자국 반도체 장비업체들의 중국 수출길을 어느 정도 열어준 조치라는 해석이 나온다. 

창신메모리는 올해를 시작으로 ‘쓸 만한 칩’을 쏟아내며 그동안 삼성과 SK하이닉스가 지배하던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삼성전자는 지난 3분기 실적발표 당일 이례적으로 “중국 메모리 업체의 구형 제품 공급 증가로 실적이 하락했다”며 별도 설명 자료까지 냈다. 무엇보다 CXMT가 칩을 저가에 쏟아내면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추락하는 것은 물론,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메모리 반도체를 수입해왔던 중국 전자업계가 자국 칩으로 대체해 관련 시장 점유율도 줄 수 있다.

엇갈린 韓日 반도체 장비업계 희비

일본 도쿄증권거래소. AP=연합뉴스

일본 도쿄증권거래소. AP=연합뉴스

반도체 첨단 장비도 HBM과 함께 대중 제재가 적용되지만, 일본·네덜란드를 포함한 총 33개 국가의 장비 업체들은 중국 수출을 위해 미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된다. 이들 국가는 자체적으로 중국 수출 통제 조치를 하고 있다는 이유다. 로이터는 “네덜란드와 일본은 이번 제재와 관련해 미국과 오랜 기간 긴밀히 협의해왔다”면서 “미국의 기대 수준에 맞는 조치를 자체 준비한 점을 인정받아 예외가 적용됐다”고 전했다. 이날 일본 도쿄증권거래소에서 도쿄일렉트론(TEL)·디스코 등 주요 반도체 장비업체 주가는 4~6%씩 올랐다.

반면 중국에 수출 중인 한 국내 반도체 장비업계 관계자는 “대중 제재와 관련해 우리 정부와 따로 소통한 적은 없다”면서 “일본 기업과 경쟁하고 있는데 앞으로 불리하게 됐다”고 말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이 중국 해관 통계를 바탕으로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 반도체 장비 수출의 44%는 중국으로 향했다. 관세청 수출입통계에 따르면 반도체 제조 장비(코드명 HS 848620) 중국향 수출 금액은 10월 15일 기준 11억7256만 달러(약 1조6450억원)에 달한다. 전재민 한국반도체산업협회 본부장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에서 국내산 장비를 많이 쓰는 상황에서 미국의 제재로 중국 기업들의 설비 투자가 위축되면 한국 반도체 소재·부품·장비기업(소부장) 기업에도 타격이 불가피하다”라고 말했다.

반도체 업계에선 패권전쟁의 핵심인 반도체 산업에 대한 한국 정부의 외교통상 전략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용석 가천대 반도체대학 석좌교수는 “중국 메모리 반도체의 저가 공세는 한국 입장에서나 골칫거리지, 미국에는 큰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간과해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라며 “기술 패권 경쟁의 핵심으로 떠오른 반도체에 대한 국가 차원의 냉철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