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집에누워있기연합, 족저근막염 연합, 고양이 발바닥 연구회…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선 이색 깃발이 휘날렸다. 깃발에 적힌 글귀는 기존 ‘투쟁’ ‘전진’ 등의 문구와는 달리 다양하고 개인적인 내용이 많았다. ‘육퇴 후 정신적 평온 쟁취연합’ 깃발을 든 최모(35)씨는 “육아 퇴근 후에 조금이라도 쉬어야 하는데 대통령이 정신을 온전히 못 하게 해서 깃발을 들고 나왔다”며 “가뜩이나 육아로 힘든데 계엄령 이후 평온한 삶이 사라지고 매일 탄핵을 외쳐야 하는 비정상적인 세상이 너무 슬프고 화가 난다”고 말했다.
이날 국회 앞 거리를 차지하고 있는 대다수의 깃발에 적힌 단체는 대부분 실제 존재하는 시민·사회단체가 아닌, 개인이나 지인들끼리 집회를 위해서 만든 일회성 모임이었다. 이들은 집에서 귤을 먹거나 게임을 하는 등의 일상이 위협 받는 것에 분개해 거리로 나왔다고 했다. ‘족저근막염 연합’ 깃발을 든 김진주(30)씨는 실제 족저근막염 환자로, 10분만 서 있어도 뒤꿈치에 통증이 있다고 전했다. 그는 “집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신세를 한탄하기보다는 코믹한 깃발을 들고 나와 시민들이 잠시라도 웃을 수 있는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지난 집회 이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선 개성 있는 깃발 명을 인증하는 글이 다수 올라왔다. SNS 트위터나 스레드 등에선 ‘화분안죽이기실천시민연합’, ‘전국냥아치혈맹’, ‘강아지발바닥연구회’ 등 다양한 깃발 사진이 게시됐다. 8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 당시 열린 집회에선 현 상황에 대한 비판과 질타가 주된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특히 마라탕이나 고양이, 게임 등 일상과 관련된 깃발일수록 시민 호응이 많았다.
일방적 구호 외치던 과거 집회와 다르다
지난 14일 서울 여의도는 ‘대통령을 탄핵하라’, ‘당을 해체하라’ 등 양대 노총과 시민단체가 구호를 외치던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진 풍경이었다. 민주주의나 정당 정치를 지킨다는 거대 담론이 아닌, 개인 일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으로 ‘계엄으로부터 내 일상을 지킨다’는 메시지가 주를 이룬 것이다. 특히 이런 현상에는 학교 수업시간에서 계엄 사태를 접한 2030 세대의 역할이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순댓국에 순대 빼고 먹기 연합’의 장은혜(24)씨는 “순댓국에 머릿고기만 있는 것을 좋아하는 보통의 시민이 탄핵 집회에 나왔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했다. 고양이발바닥연구회 깃발을 든 장희성(32)씨는 “국민의힘이나 민주당도 지지하지 않았고, 기존 운동권이 뭔지도 모른다”며 “‘계엄은 불법’이라는 생각에 나온 것일 뿐으로, 자율적인 내 생각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해 깃발을 만든 것이다”라고 말했다.
집회 참여 방식과 분위기도 달라졌다. 지난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 당시 집회는 시민단체나 지역동문회 등 특정 집단이 주도하고 시민들이 참여하는 식이었다. 이날 집회에서도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 연합이 주최는 했지만, 집회 내 콘텐트를 만들어 나가는 건 시민 몫이었다. 시민들은 엄숙한 촛불 대신 오색빛의 형광색 응원봉을 들었고, 민중가요가 나오면 흩어졌다가 K-팝 음악이 나오면 모여서 노래를 부르는 식이었다.
악 쓰지 않고 즐겁게…일상 지키는 새로운 민주주의 예고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8년 전 촛불집회 이후 시민들 사이에선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감이 자리 잡고 있다”며 “집회가 정해진 규칙 하에 움직이는 게 아니라 다양한 삶의 방식을 표출하는 하나의 장이 된 것으로, 이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정치에 반영해야할 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노력했던 과거 세대보다 현 시대 젊은 층의 분노가 더욱 강하다는 분석도 있다. 유시민 전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지난 6일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에 출연해 “지금 젊은이들은 태어났을 때 이미 자유로운 사회였는데, 갑자기 이상해진 것”이라며 “내가 갖고 있던 것을 빼앗긴 것과 아직 나한테는 없지만 갖고 싶어서 노력한 것은 (분노의) 강도가 다르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