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하지만 금년에 오페라가 갑자기 전 국민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광복절 새벽 0시에 KBS TV가 오페라 ‘나비부인’을 방영했기 때문이다. ‘나비부인’은 나가사키의 일본 게이샤와 미국인 장교의 일본식 결혼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이때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성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일본의 민요는 물론 기미가요를 소재로 만들어진 음악이 연주된다. 광복절 편성으로는 내용이 매우 부적절한 것이어서 시청자들의 비판이 쇄도했다. 곡의 줄거리 자체만 놓고 보면 일본에 대한 미화라기보다는 서양인 남성에 애절하게 목매는 동양인 여성이라는 왜곡된 오리엔탈리즘이지만, 방영된 날짜가 사람들의 분노를 키웠다.
재산 3000억원, 가장 많은 부 얻은 작곡가
공교롭게도 화제가 된 두 오페라의 작곡가는 모두 자코모 푸치니다. 그리고 올해는 1924년 11월 29일에 세상을 떠난 푸치니의 사망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사망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의 작품이 한국 국민의 입에 오르내린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푸치니는 오페라 황금시대의 마지막 스타 작곡가였다. 그가 남긴 재산이 지금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3000억원에 달한다고 하니 오페라뿐 아니라 음악 전체의 긴 역사에서 작곡만으로 푸치니만큼 부를 얻은 작곡가를 찾기 어렵다.
많은 예술가들이 궁핍 속에서 고독하게 예술혼을 쫓아 살아야 했던 시절 푸치니는 지금의 경비행기만큼 귀했던 자동차를 수시로 바꾸어 탔고, 요트를 사 모으고 에어쇼를 찾아다니는 호사를 누렸다. 그의 인기가 지금의 아이돌 못지않았던 덕분이다. 엄청난 부와 영예를 거머쥔 셀럽이었으니 늘 대중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게다가 푸치니는 키도 크고 잘 생겼을 뿐 아니라 옷차림에 매우 신경을 써 실제로 멋지게 입었다. 당시 그를 본 사람들은 그가 걷는 모습도 그리고 시가에 불을 붙이는 모습조차도 세련되었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제미냐니는 물론 푸치니와 엘비라의 친구와 친척들 모두 이들을 비난했고 둘은 사람들의 지탄과 보복을 피해 숨어 살았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헤어졌다고 거짓말을 하거나 실제로 별거에 들어갔다가 다시 동거하기를 반복했다. 그 와중에 둘 사이의 애정도 빠르게 식은 듯하다. 이 커플은 아들까지 낳았으나 제미냐니가 끝까지 이혼을 해주지 않았던 까닭에 그가 사망할 때까지 20여 년 동안 푸치니는 법적으로 여전히 미혼이었다. 바람기 많은 푸치니는 이를 이용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성들에게 추파를 던졌고 수많은 여성이 푸치니에게 유혹되었다.
그들 중에는 오랫동안 지속적인 관계를 맺은 여성도 있었고 잠깐의 쾌락을 위해 만난 여성들도 많았다. 엘비라와의 다툼이 잦아졌고 그럴수록 푸치니는 더욱더 다른 여성에게서 위안을 찾았다. 성격이 불같았던 엘비라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녀는 사사건건 푸치니를 의심하고 괴롭혔다. 심지어 애정행각을 벌이는 현장에 나타나 상대 여인은 물론 푸치니까지 폭행하기도 했다. 아무 잘못도 없는 하녀를 의심해 온갖 모욕을 주어 쫓아낸 일까지 있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하녀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욕하고 때렸고 하녀는 염화수은을 마시고 자결한다.
시대를 앞선 대중예술의 아이콘
푸치니 음악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았던 또 다른 이유는 그의 작품이 국민 영웅 베르디처럼 애국적이고 남성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20대의 푸치니는 당시 60이 넘은 베르디가 ‘아이다’의 대성공 이후 10년 넘게 침묵하고 있던 때에 베르디의 뒤를 이을 사람이라는 기대에 힘입어 인기를 얻었다. 그런데 베르디가 모두의 예상을 깨고 74세에 걸작 ‘오델로’를 내놓으며 화려하게 복귀했고 80세에 도전한 희극 오페라 ‘팔스타프’도 성공시키며 노익장을 과시한 것이다. 그런 베르디에 비해 푸치니의 작품이 가벼워 보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에도 푸치니는 오히려 당당했다. 자신은 베르디 같이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 단지 극장의 요구를 따르는 사람이며, 소재와 대본은 물론 음악까지 청중이 원하는 대로 선택할 뿐이라는 것.
사생활이 복잡하고 비평가들의 시각에서는 탐탁지 않았으나 정작 푸치니의 곡은 사람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그의 오페라 공연을 보고 감동하지 않는 사람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했으니까. 베리스모! 그의 작품은 사실주의 음악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그의 오페라 속 인물은 모두 주위에서 언제나 마주치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생생하게 노래하는 사랑, 질투, 공포 역시 누구나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일상적인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푸치니는 사람들이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을 잘 조절해서 표현하는 솜씨가 매우 뛰어났다. 피비린내 나는 장면에서조차 그 과격함을 애처롭고 아름다운 음악이 절묘하게 중화시키고 승화시키니 말이다.
푸치니를 오페라의 최고 거장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는 대중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곡가임에 틀림이 없다. 특히 그의 아리아들은 어디서나 인기가 높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인물들의 생각과 감정을 진솔하면서도 절묘하게 표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통속적이고 감상적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의 오페라는 중독성이 심하다. 막장이라고 비난하다가도 한번 보면 중독되어 버리는 아침 드라마를 연상케 한다. 실험 정신이 부족하다는 평론가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푸치니가 당당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술가연’하기보다 대중을 먼저 생각했던 푸치니야말로 시대를 앞선 대중예술의 아이콘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