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도 부도 다 가졌다, 삶이 오페라같았던 ‘셀럽’ 푸치니

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오페라의 탄생은 그 어떤 예술 장르보다 강렬했다. 1598년 자코포 페리가 최초의 오페라 〈다프네〉를 피렌체의 코르시 궁전 극장의 무대에 올리기 전까지 세상 사람들은 연기와 노래, 춤과 오케스트라가 이토록 화려하게 어우러진 공연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이후 오페라는 무려 300년 동안 공연 예술의 정상에 서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서양 사람들에게 가장 우아하고 멋진 여흥은 화려한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호화로운 오페라 하우스에 가서 공연을 감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변하는 법. 오페라는 이제 대중의 큰 관심을 받지 못한다. 더 재미있고 멋진 볼거리들이 많아진 탓이리라.

하지만 금년에 오페라가 갑자기 전 국민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광복절 새벽 0시에 KBS TV가 오페라 ‘나비부인’을 방영했기 때문이다. ‘나비부인’은 나가사키의 일본 게이샤와 미국인 장교의 일본식 결혼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이때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성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일본의 민요는 물론 기미가요를 소재로 만들어진 음악이 연주된다. 광복절 편성으로는 내용이 매우 부적절한 것이어서 시청자들의 비판이 쇄도했다. 곡의 줄거리 자체만 놓고 보면 일본에 대한 미화라기보다는 서양인 남성에 애절하게 목매는 동양인 여성이라는 왜곡된 오리엔탈리즘이지만, 방영된 날짜가 사람들의 분노를 키웠다.

재산 3000억원, 가장 많은 부 얻은 작곡가

오페라 황금시대의 마지막 스타 작곡가였던 자코모 푸치니. 1908년의 모습이다. [사진 사회평론]

오페라 황금시대의 마지막 스타 작곡가였던 자코모 푸치니. 1908년의 모습이다. [사진 사회평론]

또 다른 사건은 오페라 공연 현장에서 발생했다. 지난 9월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던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 공연의 마지막 날. 세계 최고의 디바라며 대대적으로 홍보했던 소프라노 안젤라 게오르규가 상대역을 맡은 테너가 노래하고 있는 와중에 그에게 항의하러 무대로 올라온 것이다. 바로 직전, 그 테너가 아리아 ‘별이 빛나건만’을 부른 후 관객의 박수가 이어지자 극의 진행을 거슬러서 이 곡을 한 번 더 부른 것이 화근이었다. 앙코르를 불러서 극의 흐름이 끊어졌으니 게오르규 입장에서는 불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역시 공연 중 벌인 돌발 행동이나 커튼콜 후 매너 부족으로 팬들로부터 맹비난을 받았다.

공교롭게도 화제가 된 두 오페라의 작곡가는 모두 자코모 푸치니다. 그리고 올해는 1924년 11월 29일에 세상을 떠난 푸치니의 사망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사망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의 작품이 한국 국민의 입에 오르내린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푸치니는 오페라 황금시대의 마지막 스타 작곡가였다. 그가 남긴 재산이 지금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3000억원에 달한다고 하니 오페라뿐 아니라 음악 전체의 긴 역사에서 작곡만으로 푸치니만큼 부를 얻은 작곡가를 찾기 어렵다.


많은 예술가들이 궁핍 속에서 고독하게 예술혼을 쫓아 살아야 했던 시절 푸치니는 지금의 경비행기만큼 귀했던 자동차를 수시로 바꾸어 탔고, 요트를 사 모으고 에어쇼를 찾아다니는 호사를 누렸다. 그의 인기가 지금의 아이돌 못지않았던 덕분이다. 엄청난 부와 영예를 거머쥔 셀럽이었으니 늘 대중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게다가 푸치니는 키도 크고 잘 생겼을 뿐 아니라 옷차림에 매우 신경을 써 실제로 멋지게 입었다. 당시 그를 본 사람들은 그가 걷는 모습도 그리고 시가에 불을 붙이는 모습조차도 세련되었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 포스터. [사진 사회평론]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 포스터. [사진 사회평론]

그가 늘 화제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다른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의 사생활이 문란했기 때문이다. 시작은 친구의 부인이었던 엘비라와의 불륜이었다. 1884년 밀라노 음악원을 마친 후 푸치니는 처음으로 오페라 ‘빌리’를 작곡해 초연에서 열여덟 번이나 커튼콜을 받는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한 달 반 후 평생 고생만 했던 홀어머니가 허망하게 사망했고, 푸치니는 큰 충격을 받고 절망에 빠진다. 그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것은 주류 도매업으로 성공한 고향 친구 나르치소 제미냐니였다. 그가 부인 엘비라의 피아노 레슨을 의뢰한 것이다. 푸치니는 심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제미냐니의 도움을 받았지만, 제미냐니가 출장으로 오래 집을 비운 사이 부인과 함께 달아남으로써 그를 배신한다.

제미냐니는 물론 푸치니와 엘비라의 친구와 친척들 모두 이들을 비난했고 둘은 사람들의 지탄과 보복을 피해 숨어 살았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헤어졌다고 거짓말을 하거나 실제로 별거에 들어갔다가 다시 동거하기를 반복했다. 그 와중에 둘 사이의 애정도 빠르게 식은 듯하다. 이 커플은 아들까지 낳았으나 제미냐니가 끝까지 이혼을 해주지 않았던 까닭에 그가 사망할 때까지 20여 년 동안 푸치니는 법적으로 여전히 미혼이었다. 바람기 많은 푸치니는 이를 이용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성들에게 추파를 던졌고 수많은 여성이 푸치니에게 유혹되었다.

그들 중에는 오랫동안 지속적인 관계를 맺은 여성도 있었고 잠깐의 쾌락을 위해 만난 여성들도 많았다. 엘비라와의 다툼이 잦아졌고 그럴수록 푸치니는 더욱더 다른 여성에게서 위안을 찾았다. 성격이 불같았던 엘비라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녀는 사사건건 푸치니를 의심하고 괴롭혔다. 심지어 애정행각을 벌이는 현장에 나타나 상대 여인은 물론 푸치니까지 폭행하기도 했다. 아무 잘못도 없는 하녀를 의심해 온갖 모욕을 주어 쫓아낸 일까지 있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하녀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욕하고 때렸고 하녀는 염화수은을 마시고 자결한다.

시대를 앞선 대중예술의 아이콘

푸치니와 아내 엘비라, 아들 안토니오의 모습. [사진 사회평론]

푸치니와 아내 엘비라, 아들 안토니오의 모습. [사진 사회평론]

인기가 높은 작곡가의 사생활이 이렇게 막장이었으니 푸치니는 말 그대로 움직이는 가십 제조기였다. 하지만 그의 사생활만 문제가 된 것은 아니었다. 평론가들은 그의 음악에 대해서 끊임없이 심한 비판을 해댔다. 푸치니가 활동했던 당시는 모더니즘이 지배하던 때로, 구스타프 말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클로드 드뷔시 같은 작곡가들이 경쟁적으로 새로운 음악 문법을 만들기 위한 과감한 실험을 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혁신이 작곡계의 시대적 정신이었던 셈이다. 이런 시기에 통속적이고 감상적인 작품만 내놓는 푸치니는 평론가들이 보기에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채 인기에만 영합하는 작곡가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푸치니 음악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았던 또 다른 이유는 그의 작품이 국민 영웅 베르디처럼 애국적이고 남성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20대의 푸치니는 당시 60이 넘은 베르디가 ‘아이다’의 대성공 이후 10년 넘게 침묵하고 있던 때에 베르디의 뒤를 이을 사람이라는 기대에 힘입어 인기를 얻었다. 그런데 베르디가 모두의 예상을 깨고 74세에 걸작 ‘오델로’를 내놓으며 화려하게 복귀했고 80세에 도전한 희극 오페라 ‘팔스타프’도 성공시키며 노익장을 과시한 것이다. 그런 베르디에 비해 푸치니의 작품이 가벼워 보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에도 푸치니는 오히려 당당했다. 자신은 베르디 같이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 단지 극장의 요구를 따르는 사람이며, 소재와 대본은 물론 음악까지 청중이 원하는 대로 선택할 뿐이라는 것.

사생활이 복잡하고 비평가들의 시각에서는 탐탁지 않았으나 정작 푸치니의 곡은 사람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그의 오페라 공연을 보고 감동하지 않는 사람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했으니까. 베리스모! 그의 작품은 사실주의 음악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그의 오페라 속 인물은 모두 주위에서 언제나 마주치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생생하게 노래하는 사랑, 질투, 공포 역시 누구나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일상적인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푸치니는 사람들이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을 잘 조절해서 표현하는 솜씨가 매우 뛰어났다. 피비린내 나는 장면에서조차 그 과격함을 애처롭고 아름다운 음악이 절묘하게 중화시키고 승화시키니 말이다.

푸치니를 오페라의 최고 거장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는 대중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곡가임에 틀림이 없다. 특히 그의 아리아들은 어디서나 인기가 높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인물들의 생각과 감정을 진솔하면서도 절묘하게 표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통속적이고 감상적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의 오페라는 중독성이 심하다. 막장이라고 비난하다가도 한번 보면 중독되어 버리는 아침 드라마를 연상케 한다. 실험 정신이 부족하다는 평론가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푸치니가 당당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술가연’하기보다 대중을 먼저 생각했던 푸치니야말로 시대를 앞선 대중예술의 아이콘이 아닐까.

민은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고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5년부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음악과 페미니즘’‘독재자와 음악’‘대중음악의 역사’ 등을 주제로 여러 권의 저서를 출판했으며 최근에는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시리즈를 집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