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전지적 시네마 시점
미국의 중견 작가 더글러스 케네디는 최근작 『원더풀 랜드』에서 아예 미국을 ‘연방공화국’과 ‘공화국연맹’으로 쩍 갈라 놓기까지 한다. 연방공화국은 캘리포니아 중심의 서부 연안 지역과 뉴욕 주 중심이 북동부 연안, 그리고 콜로라도와 뉴멕시코를 차지하는 비교적 리버럴리스트들의 국가가 된다. 반면 공화국연맹은 기독교 근본주의의 신정 정치를 새로운 이념으로 채택한 백인 중심 국가가 됐다. 두 나라의 대립과 반목, 전쟁은 미합중국의 대통령을 서부연합의 채드윅 상원의원이 탄핵하며 분리주의를 채택하는 과정에서 진행된다.
테러 배후에 미 정가·군부의 역공작이…
미국의 FBI 요원 앤소니 허브(댄젤 워싱턴)는 뉴욕 중심가에서 테러가 발생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하고 범인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허브는 수사를 위해 중동을 오가며 비밀작전을 수행 중인 CIA 요원 앨리스(아네트 베닝)와 공조수사를 펼친다. 그녀는 미국 내에 살고 있는 아랍계 미국인 연하 청년 사미르(다미 부아질리)를 연인으로 두고 그를 연락책으로 활용 중이다. 문제는 FBI와 CIA가 대책 마련에 부심하던 중에 실제로 시민들이 탄 시내 버스가 불분명한 배후의 폭탄 테러에 희생이 되는 대형 참사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미국 내 여론은 즉각 보복의 분위기가 형성되고 정부는 뉴욕시에 한정해 긴급 비상계엄을 발동한다. 계엄사령관으로 특공대장 데브로 대령(브루스 윌리스)이 임명되는데 이후 뉴욕은 살벌한 군부 통치 휘하로 접어든다. 아랍계 미국인들에 대한 무차별 체포 구금 고문 수사는 물론 일반 시민들의 생활도 안전을 이유로 급격하게 제한 통제된다. 시민들의 자유는 억압된다.
특이한 것은 이후 FBI 허브 요원의 노력으로 테러의 배후가 서서히 드러나는데, 놀랍게도 그 장본인은 데브로 대령 등 미국의 정가와 군부가 역 공작의 일환으로 저지른 짓이었다는 것이다. 할리우드의 음모론이 다소 지나친 감이 있지만 국가안보, 또는 애국주의가 과대망상과 집착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사람들로 인해 어떤 참사가 벌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데 시사점이 있다. 영화에서 데브로 대령이 자신의 임무가 철저하게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것임을 강조하는 표정이 압권이다. 자기 확신이 강한 강성 정치인, 군인들이 국가를 오히려 위기에 빠뜨릴 수 있음을 보여 준다. 테러의 음모에는 CIA 요원 앨리스도 간여돼 있으며 적어도 그녀는 강경파들의 계획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음이 밝혀진다.
개봉이 임박한 상태에서 국내에 계엄이 선포돼 더욱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시빌 워 : 분열의 시대’에서 미국 대통령을 연기한 배우(닉 오퍼먼)가 트럼프 현 대통령 당선자를 닮아 있는 것, 그의 말투와 제스처와 흡사한 것 역시 단순한 의도는 아닌 듯이 보인다. 영화 시작과 함께 이 대통령은 성명을 발표한다. 미국 서부와 플로리다 연합인 저항군 세력에게 최후 통첩을 발표하는 모습이다.
놀라운 것은 영화에서 내전의 양측이 서로를 참수하고 학살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부군의 한 장교(제시 플레먼스)는 주인공인 리 스미스 기자(커스틴 던스트) 일행을 앞에 두고 어디 출신이냐고 물으며, 미국인이 아니라 단순히 미국계 인종이나 민족이라는 이유로 두 사람을 즉결심판처럼 살해한다. 이 장면은 미국이 자칫 내전 상황에 빠지면 어떤 참혹한 일들이 벌어질 것인지 보여 준다. 서부군은 서부군대로 내전 당사자인 대통령을 죽이기 위해 참수 부대를 앞세워 공격을 감행한다. 지나친 상상의 이야기일 수 있지만 작금의 현실이 만들어 내는 개연성 탓에 그저 영화로만 넘길 수가 없다.
젊은 관객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헝거 게임’ 시리즈는 판엠이라는 독재 국가가 배경이고 권력 도시인 캐피톨과 그 주변 12개 구역에서 벌어지는 생존게임 이야기이다. 당연히 캐피톨 수장은 늘 계엄의 상황으로 13개 지역 전체를 통제하고 지배한다. 시리즈 첫 번째 영화 ‘헝거 게임 : 판엠의 불꽃’(2012)은 2011년 월가에서 벌어진 청년들의 시위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의 사회상이 반영된 것이다. 미국 청년들은 당시 미국의 증권가가 ‘자본의 절대 권력’으로 국가를 독점하고 돈의 힘으로 계엄상황에 준하는 독재 체제를 지배하고 있다고 내다 봤다. 미국 청년들은 영화의 주인공 캣니스(제니퍼 로렌스)가 캐피톨의 독재자들에게 저항하듯이 혁명을 통해 자본의 독점과 계엄상황을 극복해 가야 한다고 믿게 됐다. 아이러니한 것은 자본 권력의 한 축을 차지하는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들이 이런 청년들의 마음을 파고들며 ‘혁명을 상품화’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헝거 게임’ 시리즈는 전 세계적으로 수억 달러의 수익을 벌어 들였으며 청년들의 저항을 오히려 순치(順治) 시키는 역할을 했다.
‘헝거 게임’ 시리즈, ‘혁명 상품화’에 성공
조금은 다른 각도이지만 할리우드는 대통령을 하야시키는 데 있어 저널리즘의 역할에 대해 논하기도 한다. 2017년 영화 ‘더 포스트’는 워싱턴포스트지의 사주 캐서린 그레이엄(메릴 스트립, 창업주 스틸슨 헛친스의 딸로 2대 운영주였던 필립 그레이엄 사후 신문사를 운영했다)과 편집국장 벤 브래들리(톰 행크스)가 미국 대통령 닉슨을 하야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펜타곤 기밀문서’를 폭로하는 내용이다. 이 보도로 미국민들은 대통령의 거짓말을 눈으로 확인하게 됐다. 대통령의 거짓말은 늘 탄핵과 하야의 근본 원인이 된다.
작금의 한국사태가 세계를 놀라게 한 이유는 비상계엄, 탄핵, 하야 등 정쟁의 빅 이슈들이 오랜 과거 역사를 정리한 영화에서나 보는 일들이었음에도 그것을 현실에서 목격했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들도 계엄을 야만과 후진의 과거 군부 독재 치하에서나 가능한 일로 여겼었다. 영화 ‘서울의 봄’으로 이미 정리된 일로 여겼던 것이다. 과거는 영화로 구현되지만, 그 영화들은 역으로 현실에서 있음직한 여러 비극들을 사전에 제어하는 역할을 한다. 이 일 역시 언젠가 영화가 될 것이다. 그것은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아직도 쉽게 판단을 내릴 때가 아니란 게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