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대한상공회의소가 2차전지‧바이오‧반도체‧디스플레이 등 국내 첨단기업 433곳을 대상으로 ‘첨단전략산업 규제 체감도 조사’를 실시한 결과 한국의 첨단산업 규제 수준이 경쟁국보다 과다하고 느끼는 기업이 절반(53.7%)을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 기업의 72.9%는 규제 이행에 부담을 느꼈고 이 중 15.3%는 매우 부담을 느낀다고 답했다. 업종별로는 바이오(83.6%)의 부담이 가장 컸고 2차 전지(73.6%), 반도체(67.3%)가 뒤를 이었다.
한 반도체 업체 관계자는 “대만 TSMC는 노사가 합의하면 하루 근무시간을 12시간까지 늘릴 수 있어 기술개발에 매달리고 있는데 한국은 근로시간 규제에 묶여 있다”고 “하루 바짝 야근하면 끝날 테스트가 3일씩 걸리는 상황이니 기술 격차를 좁힐 수 있겠나”고 토로했다.
첨단 기업들은 규제 이행이 어려운 이유로 규제가 너무 많고(32.8%) 규제 기준이 높다(23.1%)고 답했다. 기업들이 가장 개선을 원하는 영역은 기술규제(29.6%)였다. 연구개발(R&D)이나 인증‧검사 규제에 대한 불만이 컸다. 예컨대 인공지능(AI) 기반 혈당 측정 및 진단이 가능한 채혈기를 개발하면 의료기기와 진단의료기기가 합쳐진 복합 제품으로 본다. 이 때문에 중복 인증을 거쳐야 해 비용‧시간이 많이 들고 부담이 커진다는 것이다.
인력규제(17.8%)나 금융규제(14.7%) 개선에 대한 요구도 많았다. 고사양 반도체의 경우 개발 계획부터 양산까지 대개 2~3년이 걸린다. 특히 실제 개발에 몰두하는 1년 정도는 R&D에 매달려야 하는 특성상 야근 등은 필수지만, 주 52시간 근무제가 적용되면서 R&D 속도를 내는 데 한계가 있다. R&D 자금을 구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예컨대 한계기업(3년 연속 이자보상배율이 1 미만인 기업)은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국가연구개발사업 선정 자격을 얻지 못하거나 과제 참여에 제약이 있다.
익명을 요구한 바이오 업체 관계자는 “첨단 산업은 연구개발 비용이 많이 들고 기술 개발에 성공해 수익을 내기까지 기간이 오래 걸리는데 업종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수치만으로 일괄 판단하니 유망한 업체도 자금을 조달하지 못해 기술 개발 직전에 폐업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정부도 문제점을 인식하고 주 52시간 근무제 예외 조항을 담은 반도체 특별법, 첨단전략산업기금법, 조세특례제한법 등을 추진하고 있지만, 국회 문턱이 높다. 반도체 업종 R&D 직무에 대한 주 52시간 근무제 예외 조항이 담긴 반도체 특별법에 대해 야당은 현행 유연근로제를 활용해 근무시간을 조절하면 된다는 입장이다. 여‧야의 추가 협의가 필요하지만, 이견 조율이 쉽지 않다. 강석구 대한상의 조사본부장은 “첨단전략산업은 국가 경제의 미래를 책임질 핵심분야인 만큼 효율적인 규제 개선 등 산업 경쟁력을 뒷받침해줄 지원 법안의 조속한 처리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