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표 찍히자 "식당 불 지른다" 문자 떴다…찬탄·반탄 '극한 내전'

협박 전화와 메시지가 종일 옵니다. ‘가게에 불을 지르겠다’, ‘얼굴 보고 현피(현실에서 만나 싸운다는 뜻의 은어) 뜨겠다’ 하면서요. 유튜버들이 저한테 좌표를 찍은 겁니다.
 
윤석열 대통령 관저 인근인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서 예약제 식당을 운영하는 윤영배(41) 셰프는 14일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영업을 다음 달까지 중단해야 할 상황”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지난 2일 윤씨를 ‘극좌 셰프’로 규정한 한 유튜브 영상이 올라오면서 윤 대통령 지지자들의 괴롭힘이 시작됐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식당 앞에 “빨갱이 사장 멸공” 메모 붙어

지난 8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윤영배 셰프의 식당 출입구에 한 남성이 윤씨를 비난하는 내용의 종이를 붙이고 있다. 윤씨 제공

지난 8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윤영배 셰프의 식당 출입구에 한 남성이 윤씨를 비난하는 내용의 종이를 붙이고 있다. 윤씨 제공

 
윤영배 셰프의 설명과 유튜브 영상을 종합하면 그는 지난 2일 오후 탄핵 반대 집회 참가자들과 시비 붙었다. 윤씨가 식당에서 650m 떨어진 한강진역 2번 출구 앞을 직원과 걷던 중에 ‘윤석열 체포’라는 피켓을 든 남성이 탄핵 반대 집회 참가자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을 목격하면서다. 윤씨가 “1인 시위자에게 뭐하는 거냐. 지나가게 해주라”고 말하자, 누군가 윤씨에게 욕설을 하는 장면이 영상에 담겼다. 현장에 있던 한 유튜버는 ‘어르신 폭행하는 극좌 셰프’라는 제목을 달아 영상을 올리면서 윤씨의 식당과 신상 정보도 공개했다. 윤씨는 “오히려 내가 붙잡혀 옷까지 찢어졌다”고 반박했다.

지난 2일 윤영배 셰프가 한강진역 2번 출구 앞에서 보수 집회 참가자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상황. 유튜브 캡처

지난 2일 윤영배 셰프가 한강진역 2번 출구 앞에서 보수 집회 참가자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상황. 유튜브 캡처

 
영상이 각종 커뮤니티로 확산하면서 윤씨는 식당 영업에 타격을 받았다. 식당엔 밤낮없이 전화가 걸려왔고 방화·살해 협박을 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지난 8일엔 마스크를 쓴 한 남성이 식당으로 찾아와 ‘반미 빨갱이가 양식 팔고 있네? 멸공!’이라고 적은 종이를 출입문 옆에 붙이고 떠났다. 이 장면은 CCTV에도 담겼다. 윤씨는 영상을 올린 유튜버 등을 명예훼손·모욕 등 혐의로 고소했다.

정치 성향 탓 ‘별점 테러’, 집회에선 커터칼 휘두르기도

배우 최준용씨가 운영하는 식당에 달린 리뷰들. 윤 대통령 탄핵에 찬성하는 이들은 '내란 맛집'이라는 표현과 함께 낮은 점수를 줬다. 반면 윤 대통령 지지자들은 '응원한다'는 글과 함께 높은 점수를 매겼다. 사진 카카오맵 캡처

배우 최준용씨가 운영하는 식당에 달린 리뷰들. 윤 대통령 탄핵에 찬성하는 이들은 '내란 맛집'이라는 표현과 함께 낮은 점수를 줬다. 반면 윤 대통령 지지자들은 '응원한다'는 글과 함께 높은 점수를 매겼다. 사진 카카오맵 캡처

윤 대통령 탄핵을 둘러싼 찬반 갈등이 테러 위협으로까지 격화하고 있다. 집회 현장에선 실제 물리적인 위협도 벌어졌다. 대통령 탄핵을 주장하는 한 50대 남성은 보수 집회 참가자들과 다투다가 자신의 외투 주머니에 있던 커터칼을 꺼내 허공에 휘둘러 경찰에 연행됐다. 보수 집회 참가자들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욕해 화가 난다는 이유였다.

 


 
윤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배우 최준용이 운영하는 식당 리뷰에는 “내란 맛집” “계엄 맛이 나요” 등 악평이 달렸다. 그가 지난 4일 열린 윤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에서 “계엄이 몇 시간 만에 끝나 아쉬웠다”는 취지로 말한 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양태정 변호사(법무법인 광야)는 “단순히 정치적인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전화·별점 테러를 하는 건 형법상 업무 방해가 될 수 있다”며 “전화 내용이 공포심을 유발한다면 협박에도 해당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치적 내전 상태, 군중이 격앙되기 쉬운 조건”

지난 4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 관저 인근에서 윤석열 대통령 체포·탄핵 찬성 집회에 나선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등 진보단체 회원들이 관저 방향으로 행진을 시도하자 경찰이 제지하고 있다. 뉴스1

지난 4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 관저 인근에서 윤석열 대통령 체포·탄핵 찬성 집회에 나선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등 진보단체 회원들이 관저 방향으로 행진을 시도하자 경찰이 제지하고 있다. 뉴스1

전문가들은 군중 심리와 익명성이 시위 양상을 극단으로 몰아가는 상황을 우려했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거리의 집회, 열성 지지자 집단 등 군중은 지금처럼 표현의 자유가 활성화한 ‘정치적인 내전’ 상태에선 감정적으로 격앙되기도 쉽다”고 말했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정치적·금전적 이익을 노린 사이버 레커(자극적인 콘텐트를 만드는 유튜버 등을 비유한 말)와 음모론자들이 ‘희생양 만들기’로 주목을 받으려 한다. 열성 지지자들에게 불쏘시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