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 753mm 대홍수 재앙…오늘날 서울, 이후 만들어졌다

지난해 7월 기록적인 폭우로 전국 곳곳에서 피해가 잇따른 가운데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서울스카이에서 바라본 한강이 흙탕물로 변해 있다. 뉴스1

지난해 7월 기록적인 폭우로 전국 곳곳에서 피해가 잇따른 가운데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서울스카이에서 바라본 한강이 흙탕물로 변해 있다. 뉴스1

지난해 여름 수도권 일대에 내린 폭우로 한강 공원이 침수되고 잠수교 통행이 중단됐다. 한강 수위가 7m가 넘었는데, 잠수교는 통상 수위가 5.5m 이상 되면 보행자 통행을, 6.2m를 넘어서면 자동차 통행을 금지한다. 그런데 100년 전 여름철 한강 수위가 12.74m(용산 기준)를 기록한 적이 있었다. 1925년 발생한 을축년 대홍수 이야기다. 막대한 피해를 준 홍수였지만, 이 홍수로 인해 오늘날 서울이 만들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753㎜ 폭우가 삼킨 서울

9일 서울역사박물관이 발간한 ‘을축년 대홍수 그 후 100년, 서울의 변화’ 보고서에 따르면 1925년 7월 9~11일과 15~19일까지 두 차례 집중호우로 753㎜의 폭우가 내렸다. 연이은 폭우로 한강 수위는 12.74m를 기록했다. 한강 주변 동네 피해가 심했는데, 이촌2동ㆍ뚝섬ㆍ잠실ㆍ송파ㆍ신천ㆍ풍납동 일대 마을이 사라졌다. 용산ㆍ마포ㆍ영등포 일대 주택뿐 아니라 시내에 있는 안국동ㆍ관훈동까지 수해를 입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강교도 무너지고, 노량수원지와 마포 당인리 화력발전소의 피해로 상수도와 전기가 끊기기도 했다.  

 을축년 대홍수에 구용산 일대가 침수된 모습.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을축년 대홍수에 구용산 일대가 침수된 모습.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보고서는 을축년 대홍수가 재해 기부금 모집을 제도화하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한다. 당시 복구대책은 일본인보다 조선인에게 불평등했고, 조선사회 신문사와 청년회가 주축이 돼 수재민 구출, 식량과 의복 구호, 구호소 마련에 나서기도 했다. 주민들은 연대하며 지역공동체를 복구하기도 했다. 한강 인도교 부근에 살던 200여 가구의 동부이촌동 주민들은 강 건너 노량진 본동리로 이주해 ‘복흥촌(復興村)’이라는 이름의 마을을 조성했다. 복흥촌 사람들은 1927년 상부상조기관으로 용흥청년회(湧興靑年會)를 설립하고 교육과 복지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대홍수에도 나타난 의인 

청년단원 구조 모습.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청년단원 구조 모습.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잠실리에서는 홍수에 주민이 높은 집과 나무 위로 피난하기도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봉은사 주지 나청호(羅晴湖)는 사공에게 “한 사람 구원하는 데 10원씩을 주겠다”고  약속, 배 다섯 척을 잠실리로 보내 480명을 구출했다고 한다. 현재 서울 송파구 송파초등학교 옆 송파근린공원에는 을축년 대홍수 피해와 공포를 기억하기 위해 세운 비석도 있다.   

을축년 대홍수는 무엇보다 오늘날 서울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 한강은 원래 경성 안에 있는 강이 아니었다. 홍수 이후 대대적인 한강 치수사업을 시작해 제방을 쌓기 시작했고, 도시는 한강을 품고 확장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한강은 1936년 경성시가지 계획으로 경성부의 행정구역으로 들어왔고, 63년 강남이 서울에 편입되면서 한강은 서울을 가로지르는 주요한 하천이 됐다.  


송파근린공원에 있는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 사진 서울시

송파근린공원에 있는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 사진 서울시

서울역사박물관 관계자는 “광복 후 여러 차례 홍수 피해를 겪을 때마다 을축년 대홍수의 기억이 소환됐고, 한강을 관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졌다”며 “1960~70년대 한강 주변에 제방이 건설되고, 80년대에 한강 종합개발사업이 시행돼 한강이 서울시민 생활에서 중요한 장소가 됐다”고 설명했다.

최병구 서울역사박물관장은 “오는 9월 ‘을축년 대홍수’ 관련 기획전시도 계획하고 있다”며 “재난과 재해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과 재난 이후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