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인의 세계 지배는 언제 시작되었나? [김기협의 남양사(南洋史) <37>]

김기협 역사학자

김기협 역사학자

서양문명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은 19세기 중엽부터 백여 년간 세상을 휩쓸었다. 서양인의 자만심에 그치지 않고 동양인의 보편적 열등감이 되었다. 서양을 따라가자는 ‘양무(洋務)’운동이 중국에 일어나고 ‘탈아입구(脫亞入歐)’ 구호가 일본에 퍼졌다. ‘’근대화‘는 오랫동안 대한민국의 국시(國是) 노릇을 했다.

20세기 후반이 지나가는 동안 분위기가 바뀌었다. 처음에는 “동양문명이 물질문화는 약해도 정신문화에는 나름의 가치가 있지 않나?” 조심스럽게 살피다가 “물질문화 방면에도 무시할 수 없는 실적이 동양에 있었다.” 하는 입장으로 나아갔다. 지금은 더 나아가 18세기까지 동양문명이 우위를 지키고 있었다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탈-서양(탈-유럽) 담론이 계속 자라나 왔어도 끝까지 넘기 힘든 벽이 군사 측면이었다. 중국이나 이슬람권이 정신적-물질적으로 어떤 풍요를 누려 왔더라도 서양의 군사력만은 당해낼 수 없었기 때문에 서양인의 세계 지배가 펼쳐진 것 아닌가.

J. C. 샤먼의 〈약자들의 제국〉은 이 마지막 명제까지 다시 생각할 것을 청한다. 15-16세기 대항해시대 이래 유럽의 “팽창”이 진행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팽창이 원래부터 “정복”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정복 아닌 팽창을 통해 “약자들의 제국”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J. C. Sharman, Empires of the Weak: The Real Story of European Expansion and the Creation of the New World Order(2020)

J. C. Sharman, Empires of the Weak: The Real Story of European Expansion and the Creation of the New World Order(2020)

 


19세기에야 이뤄진 유럽의 군사적 우위

13세기 동양의 군사적 우위와 19세기 서양의 군사적 우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역전이 언제 어떻게 일어났는가? 17세기 30년전쟁(1618-1648)을 통해 근대적 군사 기술과 제도가 유럽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가장 중요한 발전 내용으로 대규모 국가상비군의 운영이 꼽힌다. 상비군이기 때문에 체계적 전술훈련이 가능하게 되었고 국가가 운영 주체가 되어 방대한 비용을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근대적 국민국가의 핵심 요소로 군대가 자리 잡은 것이다.

근대 유럽의 군사적 발전에는 화기 사용 등 기술적 요소들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내용은 대규모 병력 동원이었다고 샤먼은 지적한다. 얼마나 많은 인원을 얼마나 오랫동안 동원하느냐에 승부가 걸려 있었다는 것이다. 대규모 동원을 뒷받침할 대규모 재정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에 부응하는 국민국가가 표준적 국가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전쟁이라 하면 몇만 명 병력 동원이 예사가 되었고 때로는 몇십만 명이 동원되기도 했다. 그런데 유럽 밖으로 보내는 함대의 인원은 18세기 말까지도 수백 명이 보통이었고 가장 많은 경우도 2천 명에 이르지 않았다. 아메리카에서도, 아프리카에서도, 아시아에서도 유럽인은 군사력으로 현지인을 압도하지 못했다.

다른 곳은 몰라도 아메리카에서는 유럽인이 거대한 제국들을 무너트리고 현지인을 절멸시키다시피 하지 않았는가? 샤먼은 아메리카 ’정복‘도 군사적 정복은 아니었다고 본다. 질병이 결정적 원인이었을 뿐 아니라 현지세력의 분열을 틈탄 ’침투‘였다고 설명한다. 두 제국을 무너트릴 때 동원된 스페인 병력은 수백 명에 불과했음을 지적한다.

인도양에서 유럽인의 ’정복‘ 아닌 ’적응‘

질병이라는 의외의 요소가 큰 몫을 맡은 아메리카를 제쳐놓고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보면 유럽인이 해안 거점 마련에 그치고 내륙으로는 거의 침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현지의 큰 국가들은 모두 대륙세력이어서 해상활동을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럽인에게 틈새를 준 것이다.

중국이 포르투갈인에게 마카오 거점을 허용한 것이(1557) 대표적 사례다. 명나라 조정은 포르투갈인의 말라카 탈취(1511)를 비난하면서도 그 교역활동은 실리를 위해 용납한 것이다. 일본에서 센코쿠(戰國) 분열기에 포르투갈인이 만든 거점을 바쿠후(幕府) 통일기에 들어서도 통제만 강화하며 용인한 것 역시 실용적 기준이었다.

중국과 일본에서 포르투갈인을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여기지 않은 데 비해 교역의 중요성이 크던 인도양 방면에서는 예민한 반응이 없지 않았다. 인도 동북부의 디우 해전(1509)에는 이집트의 맘루크 술탄국도 참여했다. 그러나 1517년 맘루크 술탄국이 오스만제국에 합병된 후로는 관심이 줄어들었고 포르투갈인도 도발 수준을 낮춰서 긴장이 낮아졌다.

16세기 후반 아시아에서 포르투갈인의 가장 수지맞는 사업은 일본 항해였다. 1550년부터 고아-일본 항로에 정기노선이 시작되었는데, 처음에는 5백 톤급 배가 다니다가 차츰 커져서 1천 톤이 넘는 배가 다니게 되었다. 1557년 마카오도 이 노선의 기항지로 개항했고, 일본 기항지는 1571년부터 나가사키로 정해졌다.

이 노선의 가장 중요한 화물은 일본산 은과 구리, 그리고 중국산 비단과 도자기 등이었다. 명나라가 1520년대에 왜구 문제로 일본과 공식 관계를 끊은 후 양국간 교역이 막힌 상황에서 포르투갈 배가 중계무역에 나선 것이다. 인도양 진입 초기의 포르투갈인은 폭력에 많이 의지했으나 차츰 현지 사정을 알게 되면서 틈새 전략으로 돌아선 사례다.

기생충 역할에는 국가보다 회사가

17세기는 유럽에서 국가의 역할이 늘어나던 시기였다. 그런데 이때 아시아 방면의 유럽 팽창의 선봉에 나선 것은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인도회사였다. 회사의 형태면서 치안, 외교, 화폐 발행, 사법, 전쟁 등 국가의 주요 기능을 수행했기 때문에 ’회사국가‘라 부른다.

왜 아시아에서 회사국가의 역할이 컸을까? 회사국가들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등 다른 곳에서도 활동했다. 그러나 두 동인도회사처럼 장기간에 걸쳐 큰 역할을 맡은 곳은 없었다.

먼 거리 때문에 본국의 간섭이 적었던 조건이 물론 있다. 대서양 방면의 회사들은 보고와 지시가 오가는 데 몇 주일이면 충분했으나 인도양 방면에서는 1년 넘게 걸렸다. 두 회사는 현지에 총독부를 설치하고 폭넓은 재량권을 부여했다.

샤먼은 또 하나 이유를 제시한다. 인도양 방면에는 대서양 방면과 달리 강대한 제국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수천 명에 불과한 유럽인이 정면으로 달려들 상대가 아니었다. 육지만 중시하는 현지 제국들의 눈치를 살피며 해양에서만 활동하고 교역의 이득으로 그 협력을 얻는 것이 두 동인도회사의 기본 전략이었다. 맹수가 아닌 기생충의 행태였다.

기생충 노릇에는 비열하고 비겁하고 비루한 짓도 필요하다. 정책 선택에 국민의 지지가 필요한 ’국민국가‘가 취하기 어려운 행태다. 현지 제국의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그 신하를 자임하는 것이 국민국가의 공식 사절에게 가능했겠는가? 회사국가에게는 가능했다. 출자자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이 그 유일한 사명이었기 때문이다.

1793년 청나라 황제 앞에서 영국 사절 매카트니가 고두(叩頭)의 예를 거부하고 그 이듬해 네덜란드 사절 티씽은 순순히 행한 차이도 여기에 원인이 있었을 것 같다. 매카트니는 동인도회사와 관계없는 외교관이었는데 티씽은 동인도회사의 임원으로서 본국보다 회사를 대표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유럽”에 묶인 근대인의 시각

영국동인도회사(EIC)에 비해 네덜란드동인도회사(VOC)가 폭력을 사용한 일이 많았다. 영국인이 네덜란드인보다 점잖아서가 아니었다. EIC가 활동한 인도-페르시아 지역에 비해 VOC가 활동한 동남아 지역에는 거대한 정치조직이 적었기 때문이다. 동남아 지역에서도 큰 국가들이 자라나고 있던 대륙부보다 해양부가 네덜란드인의 활동 영역이 되었다.

해양부의 자바섬에서도 VOC는 현지세력의 압박을 받았다. 1619년에 VOC의 거점이 된 바타비아는 1628-29년에 당시 세력을 키우고 있던 마타람(술탄국)의 공격으로 위기를 겪었다. 마타람이 이 공격에 실패한 후 스스로 해양활동을 줄이고 내륙 농업국가로 방향을 잡으면서 바다의 VOC와 내륙의 마타람이 병립하는 형세가 오래 계속되었다.

18세기가 지나는 동안 EIC의 활동이 VOC를 앞서게 되는 것은 현장의 경쟁에 앞서 본국의 국력 차이 때문이었다. 17세기 초 독립 당시의 네덜란드는 금융, 제조업 등 여러 방면에서 기술 강국이었다. 기술의 확산에 따라 국토와 인구가 작은 네덜란드는 국력 신장에 한계를 맞게 되었다. 결국 네덜란드가 프랑스대혁명의 파장에 말려들어 바타비아공화국으로 국체를 바꾼 (1795) 후 VOC도 해체되었다(1799).

영국의 국력 신장을 등에 업은 EIC는 쇠퇴하는 무굴제국이 비운 자리를 채우면서 인도 일대를 거대한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역할이 커지는 만큼 ’회사국가‘의 한계도 드러내게 된다. 1779-80년의 벵골 대기근이 대표적인 사례다. 1천만 명 가까운 희생자를 낸 이 사태의 악화에는 ’국가‘의 책임보다 ’회사‘의 이익을 앞세운 EIC의 정책이 큰 몫을 맡았다.

근대 초기 상황을 돌아보는 시각을 왜곡하는 두 가지 편견을 샤먼은 지적한다. 유럽에만 연구가 집중되어 온 ’공간적 편견(bias of place)‘과 19세기 이후 상황을 그 이전 시기에 소급시키는 ’시간적 편견(bias of time)‘이다. 유럽인의 세계 지배가 15세기에 시작되었다고 하는 환상은 이 두 가지 편견의 산물이라고 샤먼은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