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체제 죽었다”“대통령 결선투표제”…학계서 쏟아진 개헌 요구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정치권의 개헌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11일 동아시아연구원(EAI, 원장 손열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이 개최한 세미나에서 대통령 결선 투표제와 분권형 대통령제 도입, 국회의원 권한과 정수 확대 등 개헌 주장이 분출했다.

이날 서울 종로 EAI 에서 ‘한국 민주주의 복원과 제도 개혁 방향’을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 박명림 연세대 정치학과 교수는 현 대통령제가 낮은 득표율로 권력을 독점할 수 있는 구조라 정당성이 취약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박 교수는 “대통령 결선 투표제를 도입해 정당 간 연립·연합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며 “이렇게 하면 ‘과반 대통령’이 등장해 민주적 정당성이 강화된다”고 설명했다. 대통령 결선 투표제란 1위 후보가 과반을 확보하지 못하면 1·2위 후보를 대상으로 다시 투표하는 방식이다. 박 교수는 “국무총리는 국회에서 복수로 추천하고, 장관에 대해선 국회 임명동의제를 도입하고, 국무회의를 (심의 기구가 아닌) 의결 기구로 만들어야 한다”며 “이렇게 하면 의회 견제 기능도 강해지고, 대통령이나 대통령실보다 장관과 내각에 보다 힘이 실린다”고 강조했다.

11일 서울 종로구 동아시아연구원 컨퍼런스홀에서 열린 '한국 민주주의 미래와 제대개혁' 세미나에서 동아시아연구원 손열 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왼쪽부터 손열 원장, 박명림 연세대 교수, 임성학 서울시립대 교수, 강원택 서울대 교수. 동아시아연구원 제공

11일 서울 종로구 동아시아연구원 컨퍼런스홀에서 열린 '한국 민주주의 미래와 제대개혁' 세미나에서 동아시아연구원 손열 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왼쪽부터 손열 원장, 박명림 연세대 교수, 임성학 서울시립대 교수, 강원택 서울대 교수. 동아시아연구원 제공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87년 체제는 더는 작동하지 않는 죽은 체제”라고 했다. 강 교수는 “과거엔 유능한 대통령이 리더십을 발휘해 대통령제가 효과적으로 작동되기도 했지만, 지금 대통령제는 거꾸로 국가에 짐이 되기 시작했다”며 “정치적으로 훈련되고 비전을 가진 정치적 리더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강 교수는 대안으로 분권형 대통령제를 제안했다. 그는 “국회가 선출하는 총리에게 권한을 주되, 대통령에게는 총리 지명권을 줘 균형을 주는 것”이라며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해 장기적인 국가 업무를 맡고, 중앙정부가 장악한 권한은 지방으로 분권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부연했다.

임성학 서울시립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우리 사회의 정서적·정치적 양극화를 부르는 제왕적 대통령제와 소선거구제는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며 “다만 정치 제도 개선만으로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경제·사회 제도 개선을 병행해야 한다”고 했다. 

사회를 맡은 손열 원장은 “최근 10년여간 민주주의 절차나 법치주의에 대한 신뢰는 물론, 주요 정치 세력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면서 민주주의 후퇴 현상이 두드러졌다”며 “지금 뭔가를 바꾸지 않으면 상황은 더 나빠질 것”이라고 개헌 필요성을 강조했다.


동아시아연구원 손열 원장이 지난해 10월 23일 열린 2024 중앙포럼에서 '미 차기 행정부에 따른 한국의 외교안보 시나리오'에 대한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동아시아연구원 손열 원장이 지난해 10월 23일 열린 2024 중앙포럼에서 '미 차기 행정부에 따른 한국의 외교안보 시나리오'에 대한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이날 EAI는 개헌 찬성 여론이 과반이라는 연구 조사 결과도 공개했다. EAI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지난달 22~23일 성인 1514명을 대상으로 웹 서베이(web survey) 방식으로 조사한 결과 현행 대통령제를 바꾸는 개헌이 필요하다는 응답은 53.1%, 현행 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응답은 29.5%였다. 모름·무응답은 17.4%였다.

대통령제 개혁 방향에 대해선 43.6%가 대통령 권한을 강하게 분산해야 한다고 했고, 현상 유지를 해야 한다는 응답은 36.7%였다. 오히려 대통령 권력 강화가 필요하다는 응답은 11.4%였다. 국회의원 선거 제도 개혁에 대해선 64.7%가 찬성해 대통령제 개혁에 찬성하는 응답 비율(53.1%)보다 더 높았다. 현행 선거 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응답은 22.3%, 모름·무응답은 13.0%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