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북송' 文안보인사 선고유예…"위법하지만 분단상황 고려"

지난 2020년 3월 9일 오후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의 수석.보좌관회의 주재에 앞서 노영민 비서실장과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대화하고 있다. 사진 청와대 사진기자단

지난 2020년 3월 9일 오후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의 수석.보좌관회의 주재에 앞서 노영민 비서실장과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대화하고 있다. 사진 청와대 사진기자단

문재인 정부 때 벌어진 탈북 어민 강제북송 사건에서 1심 재판부가 당시 정부 안보 인사들에 대해 징역형의 선고를 유예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부장 허경무)는 19일 국가정보원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기소 된 정의용 전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전 국가정보원장에게 각각 징역 10개월의 선고를 유예했다.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에겐 각각 징역 6개월의 선고를 유예했다. 2023년 2월 검찰이 정 전 실장 등을 재판에 넘긴 지 2년 만이다. 선고유예란 범죄 정황이 경미한 경우 유죄는 인정하지만, 일정 기간형의 선고 자체를 미루는 법원의 판단이다. 2년이 지나면 형 선고의 효력을 잃은 것으로 간주(면소)한다.

재판부는 북한 주민을 강제 북송한 것에 대해 정 전 실장 등에게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허 부장판사는 “피고인들이 흉악범죄를 저지른 북한 주민들을 격리함으로써 대한민국 국민의 안전을 보호할 수 있단 판단에 북송을 결정하고 집행했다지만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직권행사에 가탁해 권한을 남용한 행위에 불과한 점, 송환으로 북한 주민들이 입은 기본권 침해와 북한으로 돌아가 입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피해가 큰 점 등을 볼 때 직권남용 행위로 인한 위법·부당 정도가 형사처벌 사유로 삼을 만하다”고 판단했다. 정 전 실장 등이 북한 주민이 타고 있던 어선을 나포한 뒤 5일 만에 북송에 대한 모든 의사결정과 집행을 마치는 등 적발절차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크게 하지 않은 점을 등을 고려했다는 게 재판부의 설명이다.

“강제북송은 직권남용 행위” 

재판부는 정 전 실장 등의 행위에 고의가 인정된다고 봤다. 재판부는 “정 전 실장 등이 법무비서관의 법률 검토에 따른 거라 죄가 되지 않는다고 오인했다고 하지만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단 검토 내용도 있었다”며 “노 전 실장이 법무비서관 검토를 명하는 등 주요 역할을 했고 김 전 장관도 신중 검토 등을 건의할 수 있지만 하지 않고 집행으로 나아갔다”고 지적했다.

통일부는 지난 2019년 11월 판문점에서 탈북어민 2명을 북한으로 송환하던 당시 촬영한 사진을 공개했다. 당시 정부는 북한 선원 2명이 동료 16명을 살해하고 탈북해 귀순 의사를 밝혔으나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추방했다. 사진은 탈북어민이 몸부림치며 북송을 거부하는 모습. 사진 통일부

통일부는 지난 2019년 11월 판문점에서 탈북어민 2명을 북한으로 송환하던 당시 촬영한 사진을 공개했다. 당시 정부는 북한 선원 2명이 동료 16명을 살해하고 탈북해 귀순 의사를 밝혔으나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추방했다. 사진은 탈북어민이 몸부림치며 북송을 거부하는 모습. 사진 통일부

다만 국정원법 위반 혐의는 무죄라고 봤다. 재판부는 “강제북송은 안보실장의 직권이 행사된 것”이라며 “안보실장을 제외한 나머지 피고인들이 각자 가진 직무 권한 행사만으로 북송 결정과 집행이 이뤄질 수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서 전 실장의 허위 공문서 작성 등 혐의도 무죄라고 판단했다. 검찰은 2019년 11월 5월 작성된 중대범죄자백보고서에 적힌 문구 중 “생활고로 인해 남하했다”는 주장이 종전엔 “생활고로 인해 남하하였다며 귀순요청”이었던 점과 ‘대공 혐의점은 없는 것으로 결론’ 부분이 원래는 대공 혐의점은 희박한 것으로 평가였던 점 등을 근거로 허위사실이 기재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남하 사유를 밝히며 귀순 요청을 했다는 사실까지 기재할지는 작성자의 재량”이라며 “대공 혐의점 유무를 적은 것도 객관적으로 검증 가능한 사실을 허위로 표현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위법하다”면서도 남북 분단 현실 감안

재판부는 “정 전 실장 등이 북송 결정과 집행을 정당화하는 논리대로라면 형사법의 목적과 형사사법 절차가 모두 무용한 것이 돼버리므로 이들의 행위가 위법한 것이었다고 확인할 필요가 있다”면서도 “북한 주민들이 저지른 범죄의 흉악성과 피고인들이 인간으로서 감정적인 요소를 완전히 배제하지 못한 것에 대해 참작할 사정이 있다”고 말했다.


남북이 분단된 현실도 짚었다. 허 부장판사는 “남과 북이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적대시하는 분단 이후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구축된 제도적 기반이 이어져 이 사건과 같은 사안에 적용할 법률, 지침 등이 마련되지 않았고 지속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 공론화와 토론을 통해 대한민국의 법질서가 처해있는 모순과 공백을 메우는 대신 수년간 수많은 수사인력과 공소유지 인력을 투입해 피고인에게 형을 부과함으로써 불이익을 주는 것이 더 나은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 있다”고 말했다.

허 부장판사는 “이 사건이 한번 각하 결정이 됐던 점, 피고인들이 대부분 처벌 전력이 없는 점, 당시 직책상 이례적 상황에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없어 범행에 이른 점, 재범 가능성이 없는 점 등을 고려했다”며 “형 선고를 유예함으로써 피고인들이 행위 위법성을 확인하면서 피고인들에게 실제 불이익을 과하지 않게 하는 것이 합리적 양형이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정의용 전 국가안보실장(가운데)과 서훈 전 국가정보원장(왼쪽)이 1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문재인 정부 당시 벌어진 탈북 어민 강제북송 사건에 대한 1심에서 징역 10개월을 선고 유예 받은 뒤 입장을 밝히고 있다.   법원은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오른쪽),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에게 각각 징역 6개월을 선고 유예했다. 연합뉴스

정의용 전 국가안보실장(가운데)과 서훈 전 국가정보원장(왼쪽)이 1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문재인 정부 당시 벌어진 탈북 어민 강제북송 사건에 대한 1심에서 징역 10개월을 선고 유예 받은 뒤 입장을 밝히고 있다. 법원은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오른쪽),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에게 각각 징역 6개월을 선고 유예했다. 연합뉴스

검찰은 지난달 13일 결심공판에서 정 전 실장과 서 전 원장에게 징역 5년을 구형했다. 노 전 실장에겐 징역 4년을, 김 전 장관에겐 징역 3년을 구형했다. 재판이 끝난 뒤 정 전 실장 등은 기자들과 만나 “재판부가 밝힌 양형 사유가 피고인들이 무죄임을 잘 설명하고 있다”며 “지난 정부가 국민의 안전을 고려해 내린 정책적 판단을 이념적 잣대나 사법적 절차로 재단하려는 잘못된 관행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검찰은 판결문을 검토한 뒤 항소하겠단 입장이다. 검찰 관계자는 “법원은 탈북어민들이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란  피고인들의 주장을 배척하고, 수차례 귀순 의사를 표명한 탈북어민들을 강제 북송한 것에 대해 명확하게 위법성을 확인했다”며 “본건 범행을 일체 부인하는 피고인들에 대해 형의 선고를 유예한 것이어서 수긍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탈북한 북한 어민들, 어떻게 북으로 강제 송환됐나 그래픽 이미지.

탈북한 북한 어민들, 어떻게 북으로 강제 송환됐나 그래픽 이미지.

정 전 실장 등은 2019년 11월 2일 북한에서 월남했다가 나포된 어민 2명이 최소 4차례 귀순 의사를 밝혔는데도 국정원‧통일부 등 관계 기관 공무원들에게 같은 해 11월 7일 탈북어민들을 강제로 북송하라고 지시한 혐의로 2023년 2월 기소됐다. 검찰은 정 전 실장 등이 탈북 전 북한에서 살인 혐의를 받던 탈북 어민들이 대한민국 법령과 적법절차에 따라 대한민국에 체류하며 재판받을 권리 등을 행사하지 못하게 했다고 봤다. 서 전 원장에겐 중앙합동정보조사 도중 조사가 종결된 것처럼 적은 허위 보고서를 통일부 등에 배포하고, 중앙합동정보조사 결과 보고서에서 탈북어민들의 귀순 의사 표현 사실을 임의로 삭제한 혐의(허위공문서작성)도 적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