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지정학 전쟁선 피 본다? 반도체 재미 본 한국의 역설

‘경제+안보’ 생성AI 지정학 전쟁

경제+
중국은 지난 1월 춘절(春節·음력 설) 기간 작정하고 세상을 놀라게 했다. 중국 유니트리의 휴머노이드 로봇 16대는 인공지능(AI) 훈련을 통해 인간 무용수 못지 않은 정교한 춤사위를 선보였다. 이 기간 중국의 AI 스타트업 딥시크의 저비용 AI 모델 ‘R1’은 미국 빅테크의 AI 모델을 능가하는 성능으로 ‘딥시크 쇼크’를 일으켰다. 두 기업을 배출한 곳은 풍광 좋은 관광도시였던 저장성 항저우. AI 권력이 더는 미국 실리콘밸리의 전유물이 아님을 중국 기업들은 증명하고 있다. 딥시크 쇼크 이후, 세계 AI 지도는 다시 그려지고 있다. 똘똘한 생성 AI의 경제·군사적 가치는 반도체 파워를 뛰어넘을 가능성이 크다. 더중앙플러스 ‘더 컴퍼니’가 생성 AI 기술의 지정학적 의미를 분석했다.
◆미·중, 이제는 ‘AI 실드’ 전쟁=①자본 ②인재 ③지식재산권(IP) ④데이터 ⑤에너지 ⑥컴퓨팅 파워. 우수한 생성AI 개발에 피룡한 6대 필수 요소다. 최근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생성형 AI 시대의 새로운 지정학: CEO가 준비해야 할 핵심 전략’ 보고서에서 6가지 요소를 기준으로 각국의 생성 AI 기초체력을 평가했다.

김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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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 AI의 지정학적 경쟁에서 확고한 1위는 미국. 현재 전 세계 AI 연구인력 상위 2000명 중 60%는 미국에서 활동하며 2022년부터 지난해까지 국적을 넘나든 AI 전문가 4명 중 1명은 미국으로 향했다. 인재가 모이니 최근 60년간 머신러닝 분야의 상위 피인용 논문 35%가 미국에서 나왔다. 자본력도 압도적이며 약 45기가와트(GW) 용량을 갖춘 데이터센터도 강력한 컴퓨팅 파워를 제공하는 인프라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추격이 놀랍도록 빠르다. 중국은 6가지 핵심 요소 중 IP·데이터·에너지 3개에서 미국을 제쳤다. 중국은 2019년부터 5년간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에 미국의 4배인 7만6000건의 특허를 출원했다. 과학 저널 ‘네이처’가 발표하는 ‘네이처 인덱스’에서도 중국은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미국을 제치고 국가 순위 1위에 올라섰다. 연구기관 리스트에서도 하버드대를 제치고 중국과학원이 1위를 차지했다. 자본력과 인력에서도 미국을 바짝 뒤쫓고 있다. 딥시크 창업자 량원펑은 중국 항저우의 저장대 출신인데, 저장대는 지난해 세계 QS 랭킹 44위(서울대 41위)다. 성마다 이런 대학들이 포진해 매년 이공계 인력을 배출한다. 딥시크는 중국의 수많은 고성능 AI 모델 중 하나일 뿐이며 알리바바와 스타트업 01.AI는 전 세계 주요 오픈소스 모델의 4분의 1 이상에 기여하고 있다.

김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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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시크 충격, 기업이 놓치면 안 될 점=딥시크는 기존의 생성AI 발전 공식을 깼다. 특히 미국이 반도체·장비 수출을 통제했으나, 딥시크는 제재를 비웃기라도 하듯 결과물을 세상에 내놨다. 니콜라우스 랭 BCG 지정학 센터 의장은 “중국 생성AI 발전의 주요 병목은 하드웨어에 있지만, (중국은) 여전히 쓸 만한 칩에 접근할 수 있다”라며 “(미국의) 제재는 중국의 AI 발전을 중단시키지는 못했고, 속도를 늦추는 선에 그쳤다”고 말했다. 메타의 AI 모델 라마3.3은 엔비디아의 H100을 활용해 3930만 시간 동안 훈련됐는데, 딥시크의 v3는 중국 수출용으로 성능을 제한한 엔비디아 H800을 활용해 2788만 시간 동안 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저사양 칩을 활용해 더 효율적으로 AI를 개발한 것이다.

딥시크의 성공으로 AI를 둘러싼 글로벌 전쟁은 더 격화될 전망이다. 최병호 고려대 인공지능연구원 교수는 “그래픽처리장치(GPU) 확보 전쟁이 앞으로는 추론용 칩과 데이터, 서비스를 누가 먼저 확보해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느냐의 경쟁으로 번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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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이 거세질수록 생성AI 모델의 지정학적 가치도 커질 전망이다. 생성AI 모델을 공급할 수 있는 기업은 제한적인데, 그 수요는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어, 생성AI 개발 기업을 보유했느냐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수 있다. 랭 의장은  “소수 국가와 기업이 생성AI 공급을 통제하는 과점 상황”이라며 “이들은 경제적 이점에 군사적 이점까지 누리면서, 점점 더 큰 지정학적 권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AI라는 무기를 ‘빌려 쓰는’ 국가들이 이런 상황을 자각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랭 의장은 “미·중 긴장이 고조될수록 AI 의존국은 지정학적 위험에 노출된다”며 “전 세계 기업 CEO들이 미국이나 중국의 AI 모델뿐 아니라 한국을 포함한 ‘생성AI 중견국’의 모델도 다양하게 도입을 고려해야 한다. 여러 국가의 생성AI를 활용해 기업의 리스크를 분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속속 등판하는 AI 플레이어들=BCG는 떠오르는 AI 중견국으로 유럽연합, 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UAE), 한국과 일본을 꼽았다. 미·중 싸움이 격화할수록 중견국 AI 모델의 성장 모멘텀도 함께 커진다는 거다.

김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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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는 회원국 간 분업을 통해 AI 경쟁력을 키우고 있다. 프랑스 미스트랄의 AI 모델은 이탈리아 수퍼컴퓨터에서 학습하고, 스웨덴 데이터센터에서 서비스되며, 네덜란드 ASML의 극자외선(EUV) 장비로 만든 칩을 활용한다. 총 GDP 18조 달러의 거대 시장과 미국·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데이터센터를 갖춘 것도 유리하다.

중동은 국부펀드 등 막대한 자본력으로 AI 개발에 뛰어들었다. UAE는 100억 달러 규모의 AI 벤처캐피털 펀드를 조성했고, 사우디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는 세계에서 가장 큰 산업용 생성AI 모델을 개발했다. AI 인재 유입도 활발해 2022년 이후 UAE와 사우디의 AI 인재풀은 각각 36%, 17%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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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G는 한국과 일본의 생성AI 경쟁력에 대해 “역량은 갖췄으나 규모가 미흡하다”고 평가했다. 한국과 일본 20대 기술 기업의 연간 R&D 투자액은 각각 280억 달러와 260억 달러로, 다른 중견국보다 규모가 큰 편이고 AI 특허 출원도 활발하다. 하지만 시장 규모의 한계 등을 이유로 두 국가 모두 세계적 수준의 LLM을 선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 반도체 경쟁력, AI로 확산할까=한국은 그간 생성AI 혁명의 수혜국으로 분류됐다. AI 개발에 필요한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공정 기술력이나 생산 규모에서 세계 최정상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비교우위가 지속될지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미국과 유럽 등 주요 국가들이 자국 내 반도체 생산 역량을 강화하고 있는 데다 최근 한국에 AI 메모리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은 상황을 리스크로 보는 시각도 있다. 컨설팅기업 딜로이트는 최근 보고서에서 “전 세계 D램 메모리의 약 75%가 한국에서 생산되는데 (한국의) 계엄령은 글로벌 공급망의 의존성과 집중도를 더욱 부각시켰다”고 분석했다.

랭 의장은 한국의 과제에 대해 “가장 시급한 것은 투자”라고 짚었다. “삼성은 최상위 AI 모델을 만들 수 있는 투자력을 갖춘 기업”이라면서도 그는 다른 플레이어들도 키워야 한다고 짚었다. 그는 “네이버도 유력한 공급자이며, 정부 지원을 받는 스타트업들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규제도 중요한 변수다. 정부 AI R&D 기획을 담당하는 정혜동 정보통신기획평가원 프로그램매니저는 “한국은 AI 모델 설계 실력은 충분하지만, 데이터 문제가 계속 발목을 잡는다”고 말했다. AI 스타트업 업스테이지의 김성훈 대표는 “추격조로 선정된 회사는 몇 년 동안 국내 데이터를 모두 가져다 쓸 수 있는 파격적 제안을 하는 방법도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인류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는 ‘기업’입니다. 기업은 시장과 정부의 한계에 도전하고 기술을 혁신하며 인류 역사와 함께 진화해 왔습니다. ‘기업’을 움직이는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 더중플이 더 깊게 캐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