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이 우주선 숨긴다면 이곳에…파타고니아 황홀 풍경

 

페리토 모레노 빙하(Perito Moreno Glacier)를 누비는 일명 ‘빅 아이스 투어’. 안전 사고 예방을 위해 반드시 가이드와 함께 움직여야 한다. 곳곳에 크레바스가 도사리고 있다. 사진 김은덕, 백종민

페리토 모레노 빙하(Perito Moreno Glacier)를 누비는 일명 ‘빅 아이스 투어’. 안전 사고 예방을 위해 반드시 가이드와 함께 움직여야 한다. 곳곳에 크레바스가 도사리고 있다. 사진 김은덕, 백종민

10년째 신혼여행㉒ 파타고니아

모든 운을 끌어다 쓴 여행지가 어디였냐?’고 묻는다면 그건 파타고니아(Patagonia)다. 파타고니아는 국가명이 아니다. 아르헨티나와 칠레에 걸쳐 있는 거대한 땅으로, 남미 최남단 지역을 일컫는 이름이다. 파타고니아 여행은 그리 녹록지 않다. 지구 반대편이라 거리도 멀고, 뭘 하려고 해도 비싸고, 날씨마저 변덕스럽다. 도착하는 순간 “평생 한 번이면 족하다”는 마음이 절로 든다. 그러나 한 달 여행 뒤에는 그 마음이 “살면서 꼭 한 번 가봐야 할 곳”으로 바뀐다. 인간의 상상력을 아득히 뛰어넘는 멋진 풍경이 그곳에 있었다.

아내의 여행

거친 바람의 땅 푼타 아레나스. 형형색색의 집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다. 저 중 하나가 우리 숙소였다. 사진 김은덕, 백종민

거친 바람의 땅 푼타 아레나스. 형형색색의 집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다. 저 중 하나가 우리 숙소였다. 사진 김은덕, 백종민

벌써 11년 전의 일이다. 우리는 2014년 파타고니아에서 한 달을 머물렀다. 남반구 한여름에 해당하는 1월 칠레 푼타 아레나스(Punta Arenas)에 도착했다. ‘바람의 땅’이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게 거센 바람이 우리를 마중 나왔다. 우리는 시내의 2층짜리 낡은 컨테이너 건물에 짐을 풀었다. ‘1박당 10달러’에 혹해 덜컥 예약했는데, 인터넷도 안 되고 지붕에 양철을 올린 다 쓰러져가는 집이었다. 연장 두드리는 소음과 원인 모를 기름 냄새가 아래층 공장에서 계속 올라왔다.

그래도 집을 나서면 마냥 행복했다. 나는 파타고니아 햇살이 이끌고 다니는 따스한 기운을 특히 좋아했다. 파타고니아에서만 서식하는 동식물, 거대한 빙하, 산맥, 호수, 초원 등 다양한 경관을 만날 때마다 마음이 출렁거렸다.

칠레 마그달레나섬에 모여 사는 마젤란 펭귄. 관광객은 2m 이상 거리를 둬야 한다. 만지는 것도 금지돼 있다. 사진 김은덕, 백종민

칠레 마그달레나섬에 모여 사는 마젤란 펭귄. 관광객은 2m 이상 거리를 둬야 한다. 만지는 것도 금지돼 있다. 사진 김은덕, 백종민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소는 마그달레나(Magdalena)섬이다. 푼타 아레나스에서 뱃길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외딴섬으로 사람이 아니라 펭귄이 섬의 주인이다. 약 6000쌍의 ‘마젤란 펭귄’이 섬의 푸른 들판을 장악하고 있다. 당연히 마그달레나섬은 아무 때나 열리지 않는다. 새끼 펭귄의 부화가 끝나는 10월부터 3월까지, 6개월만 입도가 가능하고 단 1시간만 섬에 머물 수 있다.


어렵사리 섬에 들긴 했는데, 함부로 섬의 주인에게 다가갈 수는 없었다. 그 작고 오동통한 펭귄 엉덩이를 만지려고 할 때마다 종민이 내 팔을 가로막았다. ‘펭귄과 2m 이상 거리 두기 규정’이 내게는 몹시 가혹했다. 마젤란 펭귄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고, 그래서 더 고귀하게 느껴졌다.

파타고니아의 자랑, ‘뿔처럼 솟아 있는 세 개의 봉우리’란 뜻의 토레스 델 파이네. 흐린 날이 많아 완벽한 모습을 보기 쉽지 않다. 사진 김은덕, 백종민

파타고니아의 자랑, ‘뿔처럼 솟아 있는 세 개의 봉우리’란 뜻의 토레스 델 파이네. 흐린 날이 많아 완벽한 모습을 보기 쉽지 않다. 사진 김은덕, 백종민

푼타 아레나스에서 버스로 3시간 거리에 푸에르토 나탈레스(Puerto Natales)가 있다. ‘죽기 전 꼭 가봐야 할 곳’ 같은 리스트에 단골로 등장하는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Torres del Paine National Park)의 들머리가 되는 도시다. 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서는 온종일 혼이 빠져 있었다. 트레킹 장비와 함께 대략 나흘 치의 식량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거센 바람을 막아 줄 등산복, 몸을 누일 텐트, 취사에 필요한 코펠과 식량, 그리고 이 모든 걸 담을 배낭이 필요했다. 다행히 시내 곳곳에 장비 대여점이 있어, 누구든 돈만 있으면 쉽게 장비를 빌릴 수 있었다. 단 이스라엘 사람만 빼고!
김은덕 think-things@naver.com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남편의 여행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일 가운데 자리 잡은 쿠에르노스 산장(Refugio Cuernos). 중간 보급기지 역할을 하는 장소다. 노르덴스콜드 호수 (Nordenskjold Lake)를 끼고 있다. 사진 김은덕, 백종민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일 가운데 자리 잡은 쿠에르노스 산장(Refugio Cuernos). 중간 보급기지 역할을 하는 장소다. 노르덴스콜드 호수 (Nordenskjold Lake)를 끼고 있다. 사진 김은덕, 백종민

파타고니아에서 유난히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이스라엘 여행자였다. 공원에서 트레킹 준비를 하는 동안 신기한 문구를 발견했다. 스페인어와 영어로 된 경고문 사이에 유대인만 알아볼 수 있는 히브리어 경고문이 떡 하니 있었다. “제발 공원에서 불을 피우지 마시오.”

이유가 있었다. 이스라엘에서 온 여행자들이 2011년 숲에서 캠핑하다 170㎢(약 500만 평) 달하는 땅을 태워 버리고 만 것이다. 바람의 땅에서 화마는 삽시간에 퍼졌다. 1300만 년 전부터 형성된 땅과 숲이 그렇게 속절없이 검은 재가 됐고, 칠레 국민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런 사정 때문에 이스라엘 여행자에게 장비를 빌려주지 않는 가게가 많았다. ‘이스라엘 사람에게 내어줄 침대는 없다’는 경고문이 붙은 게스트하우스도 있었다.

한국에서 온 우리는 별 탈 없이 트레킹에 나설 수 있었다. 온갖 먹을 거, 마실 거를 들춰 메고 ‘W 트렉’라 불리는 71㎞ 길이의 트레일을 나흘간 걸었다. 화마의 흔적이 여전했지만, 대자연의 매력 또한 컸다.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이 우주선을 숨겨야 한다면, 이만큼 좋은 은신처도 없겠구나 싶었다. 단 한 번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듯한 원시림과 초원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바다처럼 너른 호수, 이물질 하나 섞이지 않은 푸른 하늘 모두 태고의 신비를 담고 있는 듯했다. 길을 걸으며 영혼이 흔들릴 만큼 황홀한 시간을 보냈다.

페리토 모레노 빙하 위를 걷는 투어 가이드. '빅 아이스 투어'는 파타고니아에서 가장 비싼 투어 프로그램 중 하나다. 사진 김은덕, 백종민

페리토 모레노 빙하 위를 걷는 투어 가이드. '빅 아이스 투어'는 파타고니아에서 가장 비싼 투어 프로그램 중 하나다. 사진 김은덕, 백종민

아르헨티나 로스 글라시아레스 국립공원(Los Glaciares National Park)에서는 빙하를 탐험했다. 페리토 모레노 빙하(Perito Moreno Glacier)를 누비는 일명 ‘빅 아이스 투어’는 차라리 극기훈련에 가깝다. 방한 장비와 아이젠으로 무장하고 빙하 위를 걷는 프로그램인데, 등산, 빙하 트레킹 등을 포함해 총 12시간이 소요됐다. 그야말로 내 돈 주고 하는 생고생이다. 그런데도 예약 경쟁이 장난이 아니었다.

트레킹을 시작하기 전, 빙하가 무너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폭탄이 터지고 수만 명이 울부짖는 듯한 굉음이 쩌렁쩌렁 울렸다. 크레바스를 건넌 뒤 빙하가 녹은 웅덩이에 손을 담가봤다. 손가락 끝부터 얼음이 되어 버릴 만큼 차가웠다. 가이드가 옆에 오더니 ‘갈라진 틈으로 빠지면 빙하와 함께 영원히 잠들 수 있으니 조심해’라고 겁을 줬다. 위스키에 빙하 조각을 띄운 ‘온 더 락’을 마시며 투어를 마무리했다. 잔뜩 얼어붙었던 몸이 순간 후끈 달아올랐다.

빅 아이스 투어는 비싸다. 2014년에는 투어 비용이 우리 돈으로 약 12만원이었는데 현재는 60만원까지 치솟았다. 빙하가 녹는 속도만큼이나 물가가 가파르게 올랐다. 역시 파타고니아는 주저하지 않고 빨리 다녀온 사람이 승자다.
백종민 alejandrobaek@gmail.com

파타고니아 한 달 살기
아르헨티노 호수 옆에 위치한 엘 칼라파테 공항. 사진 김은덕, 백종민

아르헨티노 호수 옆에 위치한 엘 칼라파테 공항. 사진 김은덕, 백종민

비행시간 : 35시간 이상(직항 없음, 칠레 산티아고에서 푼타 아레나스까지 3시간 30분 소요)
날씨 : 여름 추천(11~3월)
언어 : 스페인어
물가 : 식비는 한국과 비슷하나 투어 상품은 매우 비싼 편이다.
부부 여행작가 김은덕, 백종민

한시도 떨어질 줄 모르는 작가 부부이자 유튜버 부부. ‘한 달에 한 도시’씩 천천히 지구를 둘러보고, 그 경험의 조각들을 하나씩 곱씹으며 서울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마흔여섯 번의 한 달 살기 후 그 노하우를 담은 책 『여행 말고 한달살기』를 출간했다. 지은 책으로 『사랑한다면 왜』 『없어도 괜찮아』 『출근하지 않아도 단단한 하루를 보낸다』 등이 있다. 현재 미니멀 라이프 유튜브 ‘띵끄띵스’를 운영하며 ‘사지 않고 비우는 생활’에 대해 이야기한다.

맛있는 이야기 '홍콩백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