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20대 여우주연상 12년만…데미무어 제친 신데렐라는

 

영화 '아노라'로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편집상을 받은 숀 베이커 감독이 환한 표정을 짓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AP=연합

영화 '아노라'로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편집상을 받은 숀 베이커 감독이 환한 표정을 짓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AP=연합

 
독립영화 제작의 한 우물을 파온 미국 영화계의 아웃사이더 숀 베이커(54) 감독이 영화계의 중심에 우뚝 섰다. 
2일(현지 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돌비 극장에서 열린 제97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베이커 감독이 연출·각본을 맡은 영화 '아노라'가 최고 영예인 작품상을 비롯, 감독·각본·편집·여우주연상 등 5관왕에 올랐다. 

지난해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데 이어 아카데미 작품·감독상을 수상하면서 델버트 만, 봉준호에 이어 칸 황금종려상과 오스카 작품·감독상을 동시에 받은 세 번째 감독이 됐다.

'아노라'는 뉴욕 스트리퍼 아노라(마이키 매디슨)가 철부지 러시아 재벌 2세와 충동적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이를 알게 된 러시아 재벌 부부가 보낸 하수인 3인방이 이들의 혼인무효 소송을 강행하는 내용의 블랙코미디다. 신데렐라가 될 뻔한 스트리퍼의 스토리에 성 노동자의 애환과 계급 갈등을 담았다.    

숀 베이커 감독, 미국 내 소수자 삶 그려온 아웃사이더   

 
베이커 감독은 '스타렛'(2012), '탠저린'(2015),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 '레드 로켓'(2021) 등의 작품을 통해 성 노동자, 불법체류자, 홈리스 등 미국의 억압받는 소수자들의 삶을 조명해왔다. 저예산으로 영화를 만들며 주류 영화계와 다른 스토리 텔링과 촬영 방식을 고집해 미국 영화계의 아웃사이더로 꼽힌다. 


예산이 부족해 아이폰으로 영화를 찍기도 한 그가 상업영화 판에 진출하지 않는 건 "특정 예산 수준을 뛰어넘으면 편집권을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노라'의 제작비는 600만달러(87억원)로 할리우드 주요 영화 제작비의 20분의 1에 불과하다.

베이커 감독은 이날 수상 소감에서 성 노동자 커뮤니티에 감사를 표하며 "이 영화는 인디 아티스트들의 피와 땀, 눈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건 세상이 분열되고 있다고 느끼는 요즘 중요한 경험"이라며 "극장 관람이라는 위대한 전통을 계속 이어가자"고 강조했다.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아노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마이키 매디슨. 로스앤젤레스 AP=연합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아노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마이키 매디슨. 로스앤젤레스 AP=연합

마이키 매디슨, 20대 배우론 12년 만에 여주상 수상

 
'아노라'에서 강렬한 연기를 선보인 주연 마이키 매디슨(25)은 유력 수상 후보로 꼽히던 데미 무어('서브스턴스')를 제치고 여우주연상을 차지했다. 20대 배우가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은 건 2013년 '실버 라이닝 플레이북'의 제니퍼 로렌스 이후 12년 만이다. 매디슨은 영화에선 신데렐라 등극에 실패했지만, 이날 시상식에선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신데렐라가 됐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2019)에서 살인마 찰스 맨슨의 추종자 역할로 주목받은 그는 "LA에서 자랐지만 할리우드는 항상 멀게만 느껴졌다. 이 자리에 서게 돼 놀랍다"며 "성 노동자 커뮤니티에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에이드리언 브로디, '피아니스트' 이어 두번째 남주상 

 
배우 에이드리언 브로디(52)는 홀로코스트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헝가리 출신 유대인 건축가를 연기한 '브루탈리스트'로 두번째 오스카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손에 넣었다. 그는 앞서 홀로코스트 비극에 휘말린 유대인 음악가를 연기한 '피아니스트'(2003)로 오스카 최연소(29세) 남우주연상 기록을 세웠다. 홀로코스트 생존자 역할로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두 번 수상한 셈이다.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브루탈리스트'로 두번째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에이드리언 브로디.  로스앤젤레스 AFP=연합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브루탈리스트'로 두번째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에이드리언 브로디. 로스앤젤레스 AFP=연합

영화에서 이민자의 희망과 고난, 분노와 좌절의 폭넓은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그의 수상 소감은 의미심장했다. "전쟁과 체계적인 억압이 트라우마, 반유대주의, 인종차별을 남겼다"며 "건강하고 포용적인 세상을 위해 기도한다. 과거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증오를 방치하지 말라는 교훈"이라고 말했다.  

남녀 조연상은 키런 컬킨과 조 샐다나가 각각 수상했다. 컬킨은 배우 제시 아이젠버그가 연출한 '리얼 페인'에서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할머니의 유언에 따라 사촌 형제와 함께 폴란드 여행을 떠난 벤지를 연기했다. '나홀로 집에' 시리즈의 맥컬리 컬킨의 친동생인 그는 트라우마를 가진 청년의 심리를 정교하게 표현해 일찍부터 오스카 수상이 점쳐져 왔다. 

샐다나 또한 가장 유력한 여우조연상 후보로 꼽혀왔다. '아바타' 시리즈의 네이티리,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가모라 등 비(非)인간 캐릭터로 인기를 끌었지만, 상과는 인연이 없던 그는 뮤지컬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에서 인생 캐릭터를 만났다. 성전환 수술을 받으려는 멕시코 마약 카르텔 수장을 돕는 변호사 리타 역을 맡아 섬세한 감정 연기는 물론, 춤과 노래 실력을 뽐냈다. 

스스로를 "오스카를 받은 최초의 도미니카 공화국 혈통의 미국인"이라고 소개한 그는 "리타 같은 여성의 강인함을 인정해준 아카데미에 감사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연기상을 받은 배우들이 함께 포즈를 취했다. 왼쪽부터 에이드리언 브로디(남우주연상), 마이키 매디슨(여우주연상), 조 샐다나(여우조연상), 키런 컬킨(남우조연상). 로스앤젤레스 AP=연합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연기상을 받은 배우들이 함께 포즈를 취했다. 왼쪽부터 에이드리언 브로디(남우주연상), 마이키 매디슨(여우주연상), 조 샐다나(여우조연상), 키런 컬킨(남우조연상). 로스앤젤레스 AP=연합

10개 부문 후보에 오른 '브루탈리스트'는 남우주연상을 비롯해 촬영상, 음악상까지 3개 부문을 석권했다. '듄: 파트 2'는 음향상, 시각효과상을 받아 장대한 스펙터클을 인정받았다.  

배우 리스크 불거진 '에밀리아 페레즈' 2관왕 그쳐  

 
최다 13개 부문 후보에 오른 '에밀리아 페레즈'는 여우조연상과 주제가상 2개 부문 수상에 그쳤다. 거장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작품으로, 지난해 칸 영화제(심사위원상, 여우주연상)와 지난 1월 골든글로브 시상식(작품상 등 4관왕)에서 선전하며 기대를 높였지만, 결과는 씁쓸했다. 트랜스젠더 주연 배우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이 과거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남긴 소수자 혐오 및 인종차별 발언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장편 애니메이션상은 라트비아 작품 '플로우', 단편 애니메이션상은 '사이프러스 그늘 아래'가 각각 수상했다. 백희나 작가의 그림책 '알사탕'과 '나는 개다'를 원작으로 한 일본 애니메이션 '매직 캔디즈'는 단편 애니 부문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하지 못했다. 

팔레스타인 주민의 비참한 현실을 다룬 '노 어더 랜드'는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받았다. 팔레스타인 평화운동가와 함께 다큐를 만든 이스라엘 저널리스트 유발 아브라함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목소리가 함께 모이면 더 강해진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이날 시상식 축하 무대에선 블랙핑크 리사가 K팝 가수 최초로 공연을 펼쳤다. 도자 캣, 레이와 함께 '007' 시리즈 주제가를 불렀다. 지난 1월 LA 산불과 사투를 벌인 소방관들이 무대에 올라 큰 박수를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