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 조선중앙TV 캡처, 뉴시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4일 미국 해군의 핵 추진 항공모함인 칼빈슨함(CVN-70)의 부산 입항에 반발하면서 "전략적 수준의 위혁적 행동을 증대시키는 선택안을 검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의 철회 없이는 '강대강 대결'을 고수하겠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한 셈이다. 특히 '전략적 수준'을 언급한 건 트럼프 행정부를 노린 고강도 전략 도발 등을 위한 명분쌓기란 분석이다.
김여정은 이날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발표한 담화에서 "미국은 올해 새 행정부가 들어서기 바쁘게 이전 행정부의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계승'하며 우리를 반대하는 정치 군사적 도발 행위를 계단식으로 확대 강화하고 있다"며 올해 들어 한반도에 전개한 미국의 전략자산과 각종 연합훈련을 자세히 언급했다.
미국 해군의 니미츠급(10만t급) 핵추진 항공모함 '칼빈슨함'(CVN-70)이 지난 2일 오후 부산 남구 해군작전사령부 부산작전기지에 입항해 접안하고 있다. 칼빈슨함은 길이 333m, 폭 76.4m, 승조원 6000여명, 비행갑판 축구장 3배 규모이며, 스텔스 전투기 F-35C 등 항공기 80~90대 탑재할 수 있어 '떠다니는 군사기지'라 불린다. 송봉근 기자
특히 김여정은 한·미·일의 군사 공조 강화를 문제 삼았다. "미국의 악랄한 반공화국 대결 책동은 3월에 들어와 칼빈슨호가 조선반도에 기여듦으로써 가중되였으며 칼빈슨호의 참가밑에 이달 중 실시될 미일한(한·미·일) 해상훈련과 '프리덤 쉴드' 합동 군사 연습을 시점으로 고조를 이루게 돼 있다"고 주장하면서다.
특히 북한이 최고위급의 대외 메시지를 통해 '새 행정부'를 거명하면서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대북 적대시 정책을 계승했다고 공식 규정한 것은 처음이다. 바이든 행정부의 확장억제 강화 기조가 트럼프 행정부 들어서도 행동으로 일부 확인되자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출한 셈이다. 정유석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기본적으로 한·미·일 공조 강화에 대한 경고이자 미국의 대북정책 전환을 압박하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 김여정은 미 해군의 로스앤젤레스(LA)급 핵추진잠수함인 '알렉산드리아함'(SSN 757)이 지난달 10일 부산 작전기지에 입항했던 사실을 거론하면서 "(미국이) 전략폭격기들의 행동까지 합치면 상시 배치 수준에서 전략자산들을 조선반도 지역에 투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전략자산 상시 배치 효과'는 바이든 행정부 때인 지난해 한·미가 핵협의그룹(NCG) 가이드라인에서 일체형 확장억제 구현에 합의하면서 쓴 표현이다.
김여정은 그러면서 "오늘의 현실은 우리의 핵무력 강화 노선의 당위성과 정당성,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켜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 1월 15일 한반도 인근 공해상공에서 대한민국 공군 F-15K 2대와 일본 항공자위대 F-2 2대, 미국 B-1B 랜서 2대가 훈련하는 모습. 사진 미 7공군, 뉴스1
북한의 이런 판단에는 냉전 종식 후 강대국들의 회유로 핵보유국 지위를 스스로 내려놓은 우크라이나가 최근 트럼프 대통령과의 종전 협상 과정에서 수모를 당하는 현 상황이 영향을 끼친 측면도 있을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김여정은 이날 "우리도 적수국의 안전권에 대한 전략적 수준의 위혁적 행동을 증대시키는 선택안을 심중하게 검토할 계획"이라고 경고했다. "적들은 수중에 보유한 모든 수단들을 동원하여 국가의 주권과 안전이익을 고수하려는 우리의 의지와 능력을 시험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주장하면서다.
북한이 지난해 11월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9형'을 발사하는 모습. 북한은 당시 자신들이 개발한 ICBM의 '최종완결판'이라고 주장했다. 노동신문, 뉴스1
전문가들 사이에선 김여정이 언급한 "전략적 수준의 위혁적 행동 증대"가 고강도 도발을 염두에 둔 포석일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이번 담화는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첫 대미 전략적 초강경 대응 방향을 알리는 신호탄"이라며 "미 본토를 위협할 수 있는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발사, 핵실험 등 고강도 군사적 행동을 감행할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성준 합동참모본부 공보실장이 이날 국방부 정례브리핑에서 "북한이 최근 미사일을 발사하려는 동향, 움직임, 또는 활동들이 있어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밝힌 것도 이런 분석을 뒷받침한다.
국방부는 이날 김여정의 담화에 대해 "'2025 자유의 방패'(FS·프리덤실드) 연습을 앞두고 확장억제 공약 이행을 위한 미 전략자산 전개, 한·미 연합훈련 등을 비난한 것은 (자신의) 핵·미사일 개발을 정당화하고 도발 명분을 쌓으려는 궤변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면서 "북한의 핵은 절대 용인될 수 없는 것으로, 북한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의 길은 핵에 대한 집착과 망상을 버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거친 욕설은 쓰지 않는 등 북한이 상대적으로 수위를 조절한 것으로 보인다는 평가도 나온다. 오경섭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향후 미국과의 대화를 고려해 수위를 조절하면서도 선적대시정책 철회를 협상의 선결 조건으로 내건 것으로 보인다"며 "미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를 핵무력 강화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도 미국과의 대좌를 염두에 둔 포석"이라고 말했다.
정영교·이근평 기자 chung.yeonggy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