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상·하원 합동 회의 연설에서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프로젝트 투자자로 한국을 직접 지목했다. 미국이 관세 부과를 무기 삼아 주요국과 무역 협상에 나선 가운데,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가 주요 카드로 떠올랐다. 미국으로부터 에너지 수입을 늘려 통상 압박을 완화할 기회가 될 수도 있지만, 자칫하면 수십조원에 달하는 투자금만 날릴 위험도 있다. 정부는 신중한 태도로 계산기를 두드리는 모습이다.
에너지·통상 분야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 측은 5일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 참여를 확정한 게 아니다. 협의체를 구성해서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한국보다 한 발 나간 트럼프의 발언에 대해서는 “트럼프식 화법인 것 같다”고 선을 그었다. 정부는 지난달 방미 이후 미국과 협의체를 구성해 알래스카 LNG 개발 프로젝트를 포함한 5가지 주제에 대해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로 했다.

4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다만 산업부 고위 관계자는 “트럼프 정부의 관심이 높은 사안인 걸 다시 한번 확인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며 “관심이 많다는 건 역으로 생각하면 우리에게 기회”라고 평가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꼭 하고 싶은 사업인 만큼 참여 여부를 협상의 지렛대로 삼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당장 참여한다고 말하지 않는 게 유리하다는 판단도 깔려있다. 일본 등 다른 나라에도 제안이 간 만큼, 참여 여부와 조건을 비교해가며 협상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신재민 기자
트럼프 정부 입장에서는 알래스카 프로젝트가 성사되면 에너지를 수출해 무역 적자 폭을 줄일 수 있고 미국 내 일자리도 창출할 수 있어 일석이조다.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 측은 “이 프로젝트는 1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고, 천연가스로 인한 잠재적 수익도 경제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다만 한국 입장에서는 계산기를 신중하게 두드려 봐야 한다. 일단 정부는 에너지 안보 측면에서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안덕근 산업부 장관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에너지 공급선 다변화와 수급 안정 측면에서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지난해 한국의 LNG 수입량 4632만t 중 호주산이 24%로 가장 많았고, 카타르(19%)와 말레이시아(13%)가 뒤를 이었다. 미국산은 12%로 4위로 늘릴 여지가 있다.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연 2000만t 규모의 LNG가 생산된다. 이는 우리나라 LNG 수입량의 약 2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다. 미리 장기 계약을 맺을 경우 상당한 규모의 가스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다.
운송 시간이 짧고 운송비 역시 싸다는 것도 장점이다. 알래스카에서 한국까지 LNG 운송에 걸리는 시간은 1~2주로, 중동(약 한 달) 대비 절반 수준이다. 파나마운하를 거치지 않고 태평양으로 운송해 통행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장점이다.
무엇보다 프로젝트에 한국 기업들이 참여한다면 또 다른 수출 기회로 이어질 수 있다. 북극해 가스전 개발에 필요한 쇄빙선 건조에서부터 대량의 철강재가 필요한 송유관 건설까지 한국 기업의 참여 여지가 크다. 김태식 에너지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한국에 당연히 수출 기회가 있을 수 있다”면서도 “다만 미국이 자국 기업을 쓸지 한국 기업에 기회를 줄지조차도 협상 대상일 것”이라고 말했다.
큰 걸림돌은 막대한 투자금이다. 알래스카 가스라인 개발 회사(AGDC)가 비용 절감 설계를 통해 총사업비를 442억 달러에서 387억 달러로 낮췄다고 홍보하고 있지만, 업계에서는 여전히 400억 달러(58조원) 안팎의 막대한 비용이 들 것으로 본다. 다른 지역 LNG 프로젝트 대비 2~3배 높은 수준이다.
이는 북극이라는 혹한의 환경에서 1300㎞에 달하는 장거리 파이프라인을 건설해야 하기 때문이다. 장상식 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북극의 극한 날씨, 영구 동토층, 그리고 거주 인구도 드물어 많은 자본투자와 높은 유지 보수 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당초 엑손모빌, BP, 코노코필립스 등 글로벌 에너지회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사업이 시작됐지만, 개발의 어려움과 사업성 문제로 진척이 멈춘 전적도 있다. 이후 알래스카 주정부가 주도해 2020년 미국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FERC)로부터 사업 승인을 받았지만, 5년 가까이 돈을 대겠다는 투자자를 찾지 못했다.
다만 산업부 관계자는 “과거보다 기술이 발전했고, 트럼프 정부 측에서 의지가 있는 만큼 규제 등이 빠르게 해소되리란 점은 긍정적으로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추가적으로 고려해야 할 리스크도 산적해 있다. 대표적으로 전문가들이 꼽는 위험 요소는 환경 소송이다. 이 지역은 원주민과 북극곰, 순록, 등 다양한 멸종 위기 동물이 서식해 환경단체와 환경 갈등이 빈번한 곳이다. 알래스카 현지 매체(Alaska Public media)에 따르면 지난해에도 2곳의 환경단체가 프로젝트가 멸종 위기 동물에 미칠 피해를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고 미국 내무부와 상무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조 바이든 정부 당시 정책 기조가 바뀌며 알래스카 LNG 개발 사업이 중단된 적도 있다. 공사 기간이 긴 만큼 향후 트럼프 정부 이후 새 정부가 출범한다면 또다시 사업이 중단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변동성이 높은 천연가스 가격 역시 변수다. 김 연구위원은 “현재보다 천연가스 가격이 떨어지면 채굴 당시에는 수익성이 없을 수 있다”고 짚었다.
전문가들은 철저하게 경제성을 염두에 두고 협상을 통해 리스크를 줄일 것을 당부했다. 김 연구위원은 “국가 간 프로젝트에 들어간다 해도 기업이랑 똑같은 수준의 경제성 분석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 연구원장은 “미국의 통상 압박 완화를 위해서는 알래스카 개발 참여는 필요하다고 본다”면서도 “투자에 따른 한국의 인센티브(보조금, 미 에너지 인프라 지원 프로그램 활용, 장기 구매 혜택 등)도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