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대 요구 중 5개 진전 이뤘는데..."이뤄진게 없다"는 전공의·의대생

정부가 의대생들 복귀를 조건으로 내년 의대 모집인원 동결 방침을 세운 가운데, 12일 충북 청주 충북대학교 의과대학이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정부가 의대생들 복귀를 조건으로 내년 의대 모집인원 동결 방침을 세운 가운데, 12일 충북 청주 충북대학교 의과대학이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정부와 의대 학장 등이 내년 의대 모집인원 '3058명 복귀'를 내세우며 의대생들에 돌아오라고 호소한 지 열흘이 지났다. 그래도 복귀 움직임은 여전히 잠잠하다. 배경엔 의정갈등이 시작된 지난해 2월 복귀 조건으로 내세운 '전공의 7대 요구안'이 "딱히 이뤄진 게 없다"(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 비대위원장, 12일 언론 인터뷰)는 전공의·의대생의 완고한 입장이 깔려있다. 1년 넘은 이 요구안이 의대생 수업 참여와 의정갈등 해소를 막는 '장벽'이 된 셈이다.

하지만 16일 중앙일보가 7대 요구안을 항목별로 분석해보니 5개는 의정갈등 전보다 상당한 진전이 이뤄졌거나 이미 받아들여진 것으로 나타났다. 핵심 요구인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와 의대 증원 계획 전면 백지화'를 두고 의·정 입장이 갈리지만, 의료계 안팎에선 정부의 동결 선언이 나온 만큼 무조건적인 복귀 거부가 설득력이 낮다는 지적이 나온다.

7대 요구안 중에서 4개는 정부·국회의 대안 마련 등이 진행되고 있다. ▶의사 수급 추계 기구 설치 ▶수련병원 전문의 채용 확대 ▶불가항력 의료사고 법적 대책 ▶열악한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이다.

의대 '3058명' 동결에도…1년 넘은 요구안, 복귀 장벽

정근영 디자이너

정근영 디자이너

의료계가 '과학적 근거에 기반을 둔 정원 결정'을 내세워 강조했던 수급추계위는 법제화를 위한 첫 문턱을 넘었다. 지난달 27일 국회 보건복지위 법안심사소위에서 추계위 설치를 담은 보건의료기본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다. 보건복지부 장관 직속의 독립 심의기구로 하고, 의료계 추천 위원이 과반수를 차지한다는 내용 등이 들어갔다.

박단 위원장은 통과 직후 페이스북을 통해 "복지부 장관 직속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결국 (의료계) 목소리를 듣는 척만 할 것"이라면서 반발했다. 하지만 '빅5' 병원을 사직한 한 전공의는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추계를 위한 추계위는 의료계 요구였다. 여기에 참여해 (정원) 감원 가능성을 기대해 봐야 한다"고 밝혔다.


나머지 셋은 정부가 지난해부터 의료개혁의 일환으로 추진하고 있다. 전국 상급종합병원 47곳은 지난해 10월부터 전문의·진료지원(PA) 간호사 중심의 중증 진료 체계를 내세운 구조전환 시범사업에 참여했다. 복지부에 따르면 전국 100개 수련병원의 전임의(펠로우) 계약률은 지난해 3월 41.9%에서 올해 2월 73.5%로 올랐다. 이는 모두 병원 내 전공의 의존도 축소의 연장선에 있다.

의료사고 대책 등 진전…"필수의료 정책 백지화 안 돼"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제1차장)이 14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제1차장)이 14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또한 의료계 불만이 남긴 했지만, 필수의료 형사 부담 완화 등을 내세운 의료사고 안전망 구축 방안이 조만간 의료개혁 2차 실행방안으로 발표될 예정이다. 7월부터는 불가항력적으로 발생하는 산모·신생아 사망 등 분만 의료사고에 대한 국가 보상금 한도가 기존 3000만원에서 3억원으로 10배 오르게 된다.

전공의들이 민감해하는 수련 환경 개선도 조금씩 속도를 내고 있다. 수련시간 단축을 위한 전공의법 개정이 지난해 이뤄졌다. 복지부는 올해 주당 근무시간 단축 시범사업을 거쳐 내년 2월께 적정 수련시간 안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전공의에 대한 부당한 명령 철회' 주장은 정부가 지난해 6월 사직서 수리금지명령과 진료유지·업무개시명령을 전면 철회하면서 반영됐다. 다만 이와 연결된 요구인 '의료법 59조 업무개시명령 전면 폐지'는 논란의 여지가 크다. 신현호 변호사(법무법인 해울)는 "의료행위를 독점하면서 진료 보고 싶을 때만 환자를 보겠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 국민의 생명권을 규정하는 헌법 10조에 어긋난다"고 밝혔다. 복지부도 "헌법상 국가의 책무인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부정적 입장이다.

남아있는 제일 큰 관건은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와 의대 증원의 백지화다. 요구안 제일 위에 오른 이 항목은 견해차가 뚜렷하다. 전공의·의대생은 비급여 진료 규제 등을 담은 필수의료 패키지를 아예 폐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부의 '의대 증원 0명' 선언도 "한시적으로 동결하되 앞으로 계속 증원하겠다는 것처럼 말해서 전공의·학생들이 신뢰하기 어렵다"(박단 위원장)라고 일축했다.

의대 교육 대책 등 새 조건도…"비현실적, 파국 갈 것" 

지난달 25일 서울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5일 서울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정부가 필수의료를 살리려 추진해온 정책 시계를 완전히 되돌리는 건 비현실적이란 지적이 많다. 강희경 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필수의료 패키지엔 의사들이 요구해온 내용이 있고, 2000명 증원 발표 전엔 환영한다는 의견까지 나왔을 정도"라면서 "독소 조항이 있긴 하지만 조정해야지 아예 백지화하자는 건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 산부인과 병원장은 "1년 넘는 전공의 집단 이탈에 묻혀 필수의료 과목 전공의들의 미래는 되레 불투명해졌다. 그런데도 필수의료를 어떻게 살릴지에 대한 대안 제시는 없고 정책 거부만 한다"고 꼬집었다.

그런데도 전공의·의대생은 의대 교육 대책 등 새로운 조건까지 내걸고 있다. 이선우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학생협회 비대위원장이 지난 7일 입장문에서 "학생들은 24·25학번 교육 파행에 대한 해결 등을 과제로 제시하는데, 무엇도 해결되지 않았다"면서 수업 복귀를 거부한 게 대표적이다.

하지만 의대 교수들은 "24·25·26학번이 쌓이는 상황에선 교육 자체가 불가능하다. 의대생들부터 돌아와야 이런 문제를 피할 수 있다"라고 호소한다. 익명을 요청한 필수의료 교수는 "전공의와 달리 의사 면허도 없는 의대생은 제적되면 큰 피해를 보게 된다. 그런데도 정부가 양보한 동결안을 거부하고 새로운 제안만 내놓는 건 비현실적이고, 파국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수업 복귀, 동료 간주 않겠다" 건대 의대생 수사의뢰 

한 의대 건물 바깥에 정부를 비판하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한 의대 건물 바깥에 정부를 비판하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한편 교육계에 따르면 지난 14일 교육부는 "수업 복귀자는 동료로 간주하지 않겠다", "향후 학업과 관련된 모든 학문적 활동에 함께할 수 없다"는 입장문을 내놓은 건국대 의대생들에 대해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건국대 측도 "징계를 위해 진상 조사 등의 절차를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의대 내 강요 행위가 이어지자 대학들은 "괴롭힘 행위는 중징계하겠다"(서울대 의대), "다른 학생의 복학을 막는 행위는 학칙에 따라 징계하겠다"(연세대 의대) 등 엄정 조치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상당수 의대생은 여전히 수업 복귀를 망설이는 분위기다. 본과 4학년 과정에 복귀한 한 의대생은 "모든 일이 마무리 된 후 학생들이 돌아왔을 때 다수의 휴학자가 소수의 조기 복귀자를 괴롭히는 걸 막을 수 있겠나"라고 했다. 연세대·고려대 의대 등이 예고한 수강신청 및 등록 시한은 오는 21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