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멋진 우리나라"…9살 아이는 스케치북에 희망 적고 웃었다 [尹파면 후 한국]

기자
전율 기자 사진 전율 기자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 이후 둘로 쪼개진 광장의 날 선 말은 깊은 상처를 남겼다. 중앙일보는 윤석열 전 대통령이 파면된 지난 4일부터 광장 밖에서 시민 44명을 만나 탄핵 이후 꿈꾸는 나라를 물었다. 아홉 살 초등학생부터 104세 할아버지까지 스케치북에 펜으로 저마다의 희망을 눌러 썼다.    

지난 4일 인천의 한 초등학교에서 송모(9)군이 스케치북에 "더 멋진 우리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적은 뒤 활짝 웃고 있다. 전율 기자

지난 4일 인천의 한 초등학교에서 송모(9)군이 스케치북에 "더 멋진 우리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적은 뒤 활짝 웃고 있다. 전율 기자

 
인천 계양구에 거주하는 김천경(104)씨는 떨리는 손으로 “서로 협력하고 존중하는 사회”를 바란다고 적었다. 6·25 전쟁 당시 29세였던 김씨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부터 지금까지 모든 대통령이 임명되고 내려오는 모습을 지켜봤다”며 “서로 돕고 존중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발달장애 아동 김모(10)군이 꿈꾸는 사회는 “가족이 행복한 나라”다. 17개월을 갓 넘은 여동생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는 김군은 “사랑하는 동생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고, 가족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초등학교 3학년인 송모(9)군은 “더 멋진 우리나라”라고 스케치북에 썼다.

시민들은 미래 세대가 행복한 나라를 꿈꿨다. 지난해 결혼한 신혼부부 안유경(29)씨와 서태원(35)씨는 “아이들이 안전하고 행복한 나라”를 꿈꾼다고 입을 모았다. 안씨는 “첫 아이 출산을 앞두고 있는데, 아이를 걱정 없이 키울 수 있는 안전한 사회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안씨는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당시에 나도 또래였는데, 우리 아이는 내가 겪은 것보다는 따뜻한 세상에서 자라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가장 많이 적힌 단어 ‘공정과 어린이’

 

낙원상가에서 기타 매장을 운영하는 정준영(42)씨가 지난 4일 매장 앞에서 스케치북을 들고 있다. 정씨는 "대한민국 아이들은 공정·상식·평등한 사회에서 자신의 꿈을 실현했으면 좋겠다"고 적었다. 전율 기자

낙원상가에서 기타 매장을 운영하는 정준영(42)씨가 지난 4일 매장 앞에서 스케치북을 들고 있다. 정씨는 "대한민국 아이들은 공정·상식·평등한 사회에서 자신의 꿈을 실현했으면 좋겠다"고 적었다. 전율 기자

 
유치원 교사 백혜선(55)씨의 희망은 “아이들과 부모 모두 행복한 나라”다. 백씨는 “부모는 돌봄 걱정 없고, 아이들은 안전한 세상에서 자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중학생과 초등학생 아이 둘을 키우는 정준영(42)씨도 “정권이 달라진다고 해서 세상이 크게 바뀔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면서도 “우리 아이들은 평등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시민들이 스케치북에 가장 많이 적은 단어는 ‘공정과 어린이’(각 5명)였다. 만연한 미움과 불평등이 사라졌으면 하는 희망을 담아 쓴 ‘혐오’와 ‘평등’(각 4명)이란 단어도 눈에 띄었다. 3명의 시민은 안심(安心)할 수 있는 사회를 꿈꿨다. 이외에 ‘존중’, ‘정의’, ‘일자리’(각 2명) 등이 뒤를 이었다.

시민들 한 목소리 “화합은 ↑, 혐오는 ↓”

이제 ‘화합’과 ‘통합’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국민권익 관련 사건을 담당하는 김광훈 변호사(법무법인 동인)는 “우리 사회가 너무 경쟁에 매몰된 형태이다 보니까 앞만 보고 달려가려고 하는 것 같다”며 “심해진 양극화 속에서도 주위를 돌아볼 수 있는 따뜻한 대한민국을 꿈꾼다”고 했다. 군인 출신 장팔영(86)씨의 바람은 “대한민국 만세와 함께 만민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는 “전라도고 경상도고, 보수고 진보고 따질 것이 없다. 이쪽 끝이나 저쪽 끝이나 격해지면 누가 옳은 것 없이 다 똑같아진다”고 했다. 

지난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만난 장팔영(86)씨는 "만민이 하나가" 되는 사회를 희망한다고 적었다. 전율 기자

지난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만난 장팔영(86)씨는 "만민이 하나가" 되는 사회를 희망한다고 적었다. 전율 기자

 
주부 신미경(57)씨도 “지역과 정치색으로 분열된 대한민국이 다시 통합을 꿈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울 종로구 돈암동 쪽방촌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이모(78)씨는 “계엄 이후 텔레비전을 볼 때마다 무슨 일이 생길까 늘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며 “날카롭지 않고 편안한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혐오 없는 세상’을 바라는 시민도 많았다. 한남동 인근 회사로 출근하는 오모(30)씨는 날선 말을 뱉는 시위대와 매일 마주쳐야만 했다. 오씨는 “맨날 거리에서 남을 미워하는 말만 많이 들었는데 정말 피로했다”며 “광장에서 아름다운 말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오면 좋겠다”고 적었다. 서울 용산구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김모씨는 “거리로 나와 목소리를 보탠 20·30 여성들을 위하는 사회로 나아갔으면 좋겠다”며 “성차별 없는 사회, 여성혐오 없는 사회를 바란다”고 했다. 직장인 정태은(29)씨는 “갈수록 성별이 다르다고, 지지하는 정당이 다르다고 서로 아무렇지 않게 혐오의 표현을 뱉는 것 같다”며 “갈라치기와 혐오가 없는 대한민국을 바란다”고 말했다.

서울 용산구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김모씨는 지난 4일 오후 자신의 카페에서 "2030 여성들이 안전한 한국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율 기자

서울 용산구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김모씨는 지난 4일 오후 자신의 카페에서 "2030 여성들이 안전한 한국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율 기자

 
시민들의 정치 참여가 활발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었다. 환경미화원 함종길(52)씨는 “우리나라 대통령들이 탄핵되는 것은 지긋지긋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함씨는 “계엄과 탄핵 정국의 바탕에는 잘못된 법을 만든 국회의 잘못도 있다”며 “시민들의 민의가 국회에 제대로 반영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고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