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 시대에 영원한 가치를 내세운 럭셔리 브랜드…2025 밀라노 디자인 위크 [더 하이엔드]

2025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홈 컬렉션을 최초 공개한 루이 비통. 사진 루이 비통

2025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홈 컬렉션을 최초 공개한 루이 비통. 사진 루이 비통

 
세계 최대 디자인 축제인 ‘밀라노 디자인 위크’가 지난 7일 개막, 13일 마무리됐다. 행사는 올해 63회를 맞는 ‘밀라노 가구 박람회(Salone del Mobile Milano)와 ‘장외 전시(Fuorisalone)’로 구성된다. 가구 및 리빙 트렌드를 넘어 이제는 전 세계 디자인 및 럭셔리 업계가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교류하는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했다. 방문객 수 역시 지난해 역대 최대인 37만 824명을 기록했고, 행사 수익은 2억 7500만 유로(약 4500억 원) 규모다. 일주일 동안 1000개가 넘는 이벤트가 동시다발적으로 열려 도시 전체가 축제장으로 변신하는데, 올해 본 행사는 ‘인간을 향한 사유(Thought for Humans)’를 주제로 37개국에서 2100여 개 업체가 참여했다. 

2025 밀라노 가구 박람회(Salone del Mobile Milano)는 장외 전시(Fuorisalone)와 함께 4월 7일부터 13일까지 밀라노 전역에서 열린다. 사진 밀라노 가구 박람회 ⓒAlessandro Russotti

2025 밀라노 가구 박람회(Salone del Mobile Milano)는 장외 전시(Fuorisalone)와 함께 4월 7일부터 13일까지 밀라노 전역에서 열린다. 사진 밀라노 가구 박람회 ⓒAlessandro Russotti

 
규모와 명성 덕에 행사는 럭셔리 브랜드에게도 패션위크만큼 중요한 이밴트가 됐다. 브랜드 고유의 디자인 유산과 기술력, 라이프스타일 철학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큰 장인데다, 패션·건축·디자인·예술과의 접점이 늘면서 럭셔리의 경험을 재정의하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MSGM·지미 추·더 로우 등 34개 브랜드가 새롭게 참가해 열기를 지폈다. 더하이엔드가 눈에 띄는 경향 몇 가지를 살펴봤다. 

프리미엄 리빙 영역으로 확장하는 럭셔리

루이 비통은 세계적인 디자이너들과 협업한 ‘홈 컬렉션’을 최초로 공개했다. 이미 2012년부터 ‘오브제 노마드’를 통해 디자인 가구를 선보여 왔지만, 이번 컬렉션은 앞선 오브제 노마드를 포함해 5가지 카테고리로 구성된 최종 확장판이라는데 의미가 있다. 유명 디자이너인 하이메 야욘을 비롯해 인디아 마하다비, 스튜디오 캄파나 등이 총출동했다. 

팔라초 세르벨로니 궁전 1층은 ‘발견의 여정’을 주제로 루이 비통의 홈 컬렉션으로 채워졌다. 사진 루이 비통

팔라초 세르벨로니 궁전 1층은 ‘발견의 여정’을 주제로 루이 비통의 홈 컬렉션으로 채워졌다. 사진 루이 비통

 
올슨 자매가 2006년 론칭한 ‘더 로우’는 최근 인기에 힘입어 최상급 캐시미어 침구로 구성된 첫 홈웨어 라인을 공개했다. 


패션 하우스가 리빙 아이템을 선보인 사례는 이미 많았고 수년 전부터 지속된 흐름이다. 하지만 올해는 카테고리 확장에 머무르지 않고, 더욱 고급화한 하이엔드급 시장을 겨냥한 점이 눈에 띈다. 미술관의 ‘화이트 큐브(전시장)’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에르메스의 홈웨어 전시장만 봐도 그렇다. 토마스 알론소가 디자인한 사이드 테이블이나 손으로 짠 캐시미어 담요는 궁극의 미니멀리즘을 드러내며 예술과 삶의 간격을 좁혔다.



밀라노 팔라초 치테리오(Palazzo Citterio)에서 공개된 로에베 티팟(LOEWE TEAPOTS) 컬렉션. 사진 로에베

밀라노 팔라초 치테리오(Palazzo Citterio)에서 공개된 로에베 티팟(LOEWE TEAPOTS) 컬렉션. 사진 로에베

 

변하지 않는 수공예의 가치

로에베는 매년 공예의 가치를 집중 조명하는 전시를 열어 주목받았다. 9번째 행사인 올해는 25명의 세계적인 아티스트·디자이너·건축가들이 작업한 티 팟(tea pot·차 주전자)을 선보였다. 컬렉션에는 한국의 조민석 건축가, 이인진 도예가가 포함되어 눈길을 끌었는데, 서로 다른 문화와 예술 언어를 지닌 작가들이 각자의 시각으로 ‘차 문화’를 다룬 점이 볼거리다. 

16세기 건축 유산인 산 심플리치아노(San Simpliciano) 수도원 회랑에서 개최된 ‘Gucci | Bamboo Encounters’ 전시. 사진 구찌

16세기 건축 유산인 산 심플리치아노(San Simpliciano) 수도원 회랑에서 개최된 ‘Gucci | Bamboo Encounters’ 전시. 사진 구찌

 
구찌는 전시회를 통해 ‘뱀부’의 유산을 내세웠다. 1940년대 중반, 최초로 대나무 소재를 사용해 핸드백 손잡이를 만든 장인정신과 아이코닉한 스타일을 재조명한 것. 한국인 아티스트 이시산 작가를 비롯해 7명의 아티스트들이 대나무를 창의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을 선보였다.

전설적 디자이너를 소환하다  

구관이 명관이라는듯 디자인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전설적 디자이너를 소환한 브랜드도 있다. 생로랑은 20세기 위대한 디자이너이자 건축가인 샬롯 페리앙의 가구 4점을 전시했다. 그가 1943년부터 1967년까지 디자인한 가구들로, 스케치 형태로만 존재했던 것을 세밀하게 재현해 한정판으로 출시했다. 창립자인 입생 로랑이 생전 그의 가구를 수집하며 지원해 온 뜻을 기리기 위해서다. 주얼리 브랜드 다미아니는 알레산드로 멘디니의 대표작들을 전시했다. 불투명 유리와 투명 유리를 겹겹이 쌓은 ‘베리토’ 화병부터 얼굴 형상이 특징인 ‘지오토’ 컬렉션까지 멘티니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와 하이주얼리의 조화를 엿볼 수 있다.

생 로랑은 파빌리옹 비스콘티에서 샬롯 페리앙의 디자인 가구를 선보인다. 사진 생 로랑

생 로랑은 파빌리옹 비스콘티에서 샬롯 페리앙의 디자인 가구를 선보인다. 사진 생 로랑

 
프라다는 제품보다 아이디어와 학제 간 교류를 도모하는 연례 심포지엄인 ‘프라다 프레임’을 4회째 연다. 올해는 ‘이동(In Transit)’을 주제로 인프라와 모빌리티의 상호작용을 탐구하는 장을 마련했다. 이밖에 돌체앤 가바나·아르마니·리모와·미소니·펜디 등 여러 브랜드가 디자인을 중심으로 하는 이벤트와 행사를 열어 관람객의 발걸음을 붙들고 있다.

다미아니는 베네치아 유리 예술의 명가 베니니(Venini)의 아카이브에서 선별한 알레산드로 멘디니의 대표작을 선보였다. 사진 다미아니

다미아니는 베네치아 유리 예술의 명가 베니니(Venini)의 아카이브에서 선별한 알레산드로 멘디니의 대표작을 선보였다. 사진 다미아니

 
이처럼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 참여한 브랜드들의 행보를 살펴보면 팬데믹 이후 급격히 팽창했던 시장의 들뜬 분위기를 지나, 세대를 초월하는 가치와 디자인적 경험에 집중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전 세계에 불어닥친 인플레이션의 압박과 경제 침체기에 맞서는 전략일 수 있다. 서민경 건국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겸임교수는 “진귀한 경험을 선사하는 것은 오늘날 새롭게 정의되는 럭셔리라고 할 수 있다”면서 “디자인 위크는 럭셔리 브랜드들이 화려한 공간 연출로 진검승부를 벌이는 각축장이 되었다”고 짚었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오히려 변하지 않는 가치나 예술적 경험에 가치를 두는 시대 흐름을 따르는 유연한 접근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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