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중앙] 조선 넘어 한국 회화사의 거장 ‘겸재 정선’ 예술세계로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 아마 그의 이름은 잘 몰랐어도 그의 그림은 교과서를 비롯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한번쯤 봤을 법한 진경산수화의 대가입니다. 한여름 소나기가 지나간 뒤 비에 젖은 인왕산 바위와 산 아래 낮게 깔린 구름이 조용히 분위기를 압도하는 ‘인왕제색도’나, 금강산 1만2000봉을 원형 구도의 부감법으로 거침없이 그려낸 ‘금강전도’는 일찍이 국보로 지정된 바 있죠. 겸재 정선은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산천을 개성 넘치는 필치로 생생하게 그려낸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정립하는 등 18세기 조선 회화의 전성기를 이끌며 후대 화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어요. 한국 미술사를 대표하는 화가로 꼽히는 겸재 정선의 예술세계와 그 가치를 2회에 걸쳐 탐구해봤습니다.

① 조선 넘어 한국 회화사의 거장 ‘겸재 정선’ 예술세계로 
② 18세기 조선으로부터 350년, 이어지는 겸재 정선의 가치

지난 4월 2일부터 6월 29일까지,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 겸재 정선(이하 겸재)의 예술세계를 총체적으로 조명해 볼 기회가 마련됐어요. 2025년 삼성문화재단 창립 60주년, 2026년 겸재 탄생 350주년을 맞아 겸재를 주제로 한 전시로는 사상 최대 규모의 기획전이 열리거든요. 삼성문화재단(이사장 김황식)과 간송미술문화재단(이사장 전영우)이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에서 공동 개최하는 ‘겸재 정선’전입니다.
무려 79점을 보낸 간송미술관에 이어 호암미술관 15점과 국립중앙박물관 33점을 비롯한 18개 기관과 개인 소장품 등 총 165점(국보 2건, 보물 7건 57점, 부산시유형문화재 1건)이 한자리에 모였죠. 특히 국보·보물로 지정된 겸재의 지정 작품 12건(국보 2건, 보물 10건) 중 총 8건 55점(국보 2건, 보물 6건 53점)을 한번에 볼 수 있게 된 건 이번 전시가 처음입니다.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를 정립시킨 화가로 알려진 ‘겸재 정선’ 기획전을 찾은 김태린·김도연·서진하(왼쪽 둘째부터) 학생기자가 김규태 연구원의 설명을 듣고 있다.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를 정립시킨 화가로 알려진 ‘겸재 정선’ 기획전을 찾은 김태린·김도연·서진하(왼쪽 둘째부터) 학생기자가 김규태 연구원의 설명을 듣고 있다.

전시는 크게 1부 ‘진경에 거닐다: 겸재 정선 진경산수화’, 2부 ‘문인화가의 이상: 정선의 작품세계’로 나뉘어요. 1부는 다시 ‘금강산을 찾아서: 금강산과 관동’ ‘서울을 그리다: 한양과 근교’로 세분해 겸재를 대표하는 진경산수화의 흐름을 보여줍니다. 2부에선 진경산수화 외에 겸재가 그렸던 고사인물화·화조영모화·초충도 등 다양한 주제를 다뤄 그의 총체적인 예술세계를 살필 수 있죠. 소중 학생기자단은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김규태 리움미술관 소장품연구실 개원연구원과 함께 전시실에 들어갔어요.

겸재 정선 대표작 165점 한자리에

가장 먼저 맞이하는 건 겸재의 대표작 중에서도 대표로 꼽히는 두 점입니다.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가 나란히 걸렸죠. 왼쪽에 자리한 인왕제색도는 1751년 겸재가 76세에 이르기까지 쌓아 온 진경산수화의 대가다운 기량을 마음껏 펼쳐 보인 대작이에요. 여름날 소나기가 내린 후 개이기 시작하는 하늘 아래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 인왕산의 모습을 실감 나게 묘사했죠. 물기가 남아 있는 거대한 암벽을 진한 먹으로 중첩하고 다른 산들은 빠른 필선으로 간략하게 표현해 인왕산의 육중한 골격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 겁니다. 걷히는 비구름 밖으로 나타난 산봉우리의 굴곡과 농묵으로 표현한 소나무들은 전체적으로 생동하는 경관을 보여주죠. 김 연구원은 “줄곧 인왕산 기슭에 살던 겸재가 그린 인왕산 중 이렇게 큰 그림은 인왕제색도가 유일하다”며 “말년의 능숙한 필치를 잘 보여준다”고 귀띔했어요.


‘겸재 정선’ 기획전은 겸재의 대표작 중에서도 대표로 꼽히는 인왕제색도(왼쪽)·금강전도로 전시를 시작한다.

‘겸재 정선’ 기획전은 겸재의 대표작 중에서도 대표로 꼽히는 인왕제색도(왼쪽)·금강전도로 전시를 시작한다.

인왕제색도는 고서화 보호를 위해 5월 6일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로 돌아갔다가 11월 미국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박물관을 시작으로 약 3년간 이건희컬렉션 해외 순회전에 출품됩니다. 즉, 당분간 국내에서 보기 힘들어지니 인왕제색도를 실물로 보려면 약간 서둘러야 하죠. 인왕제색도의 빈자리는 5월 7일부터 ‘풍악내산총람’이 채웁니다. 풍악내산총람은 64세 무렵 채색을 다루는 데 완숙한 경지에 오른 겸재의 대표작으로, 단발령에서 바라본 금강산의 지형적 특징을 섬세한 필치로 묘사해 금강전도와는 또다른 묘미를 느낄 수 있어요. 거친 바위산은 녹색 바탕에 흰색이 더해져 마치 서리가 내려앉은 듯한데, 수풀이 울창한 흙산은 부드러운 붓 터치와 짙푸른 색채, 길쭉한 점 형태의 나무 표현으로 생동감을 더했죠.

10여 년 만에 대중 앞에 선보이는 금강전도는 겨울 금강산인 개골산을 담아낸 것으로, 겸재가 그린 금강산 진경산수화 중에서도 대표작으로 꼽히죠. 금강산의 수많은 봉우리가 모두 한눈에 들어오도록 위에서 내려다본 시점으로, 뾰족한 돌산과 나무숲이 우거진 흙산을 오로지 점과 선만으로 뚜렷하게 대비시켜 표현했습니다. 김 연구원은 “금강산은 정선이 가장 많이 그린 주제”라며 “금강전도는 뾰족한 돌산과 봉우리는 붓을 수직으로 내려긋고, 소나무가 우거진 흙산은 옆으로 뉘어 그리는 등 필치의 차이를 잘 볼 수 있다”고 설명했어요. 

겸재가 활동한 18세기 조선은 사회가 안정되며 경치 좋기로 소문난 전국의 명승지를 찾아다니는 유람 문화가 유행했어요. 명산이자 불교 성지인 금강산은 그중에서도 인기로 누구나 가보고 싶어 했죠. 겸재는 36세 때인 1711년 친구이자 뛰어난 시인인 사천 이병연의 초대로 처음 금강산을 여행하고, ‘신묘년풍악도첩’(13폭)을 그렸습니다. 김 연구원은 “겸재 진경산수화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며 “첫 여행이라 그런지 가는 길목은 물론 내금강과 해금강의 명소를 다 담아내려 노력했다”고 했죠. 소중 학생기자단은 피금정에서 출발해 단발령·장안사·보덕굴·백천교를 지나 해산정으로 나와 관동지역으로 이어지는 여행길을 그림으로 감상했어요.  

‘바다와 산의 정신을 담은 화첩’, 금강산과 동해의 초상화라는 뜻으로 1747년 72세 겸재가 금강산을 여행하고 노대가의 솜씨로 그려낸 ‘해악전신첩’의 ‘금강내산’(간송미술문화재단).

‘바다와 산의 정신을 담은 화첩’, 금강산과 동해의 초상화라는 뜻으로 1747년 72세 겸재가 금강산을 여행하고 노대가의 솜씨로 그려낸 ‘해악전신첩’의 ‘금강내산’(간송미술문화재단).

이후 ‘금강전도’ ‘비로봉’ 등 수많은 금강산 명작을 그려낸 겸재는 72세를 맞아 36년 전 여행을 회상하며 다시 금강산에 다녀와 ‘해악전신첩’(21폭)을 그렸습니다. 겸재는 앞서 1712년 금강산의 아름다운과 그 감상을 그리고 이병연의 시를 더해 ‘해악전신첩’을 만들었는데요. 해악전신첩과 신묘년풍악도첩은 겸재의 이름을 널리 알렸죠. 다만 이 해악전신첩은 소실돼, 같은 이름으로 다시 화첩을 만든 겁니다. “사라진 (전)해악전신첩 대신 신묘년풍악도첩과 (후)해악전신첩을 같이 보면 36세 무명화가에서 72세 노대가로 대성한 겸재의 화풍 변화를 볼 수 있다”는 김 연구원의 말에 소중 학생기자단은 잠시 두 화첩 사이를 오가며 비교해 보기도 했죠. 해악전신첩뿐 아니라 다양한 금강산 그림들을 보며 나이를 먹고 원숙해질수록 겸재만의 스타일과 개성이 더 잘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약 3m에 달하는 길이로 눈길을 끄는 ‘봉래전도’는 한때 중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림 첫머리와 뒤에 중국 문인들이 쓴 글이 붙어있어요. 항저우의 골동가게에서 구했다, 누가 그렸는지 모르겠지만 뛰어나다, 찾아보니 조선의 겸재 정선이 그린 것이다 식으로 설명하는 내용이 들어있죠. 조선 사신이 중국에 갈 때 겸재 그림을 가져가 보여줬다는 기록도 있어 중국에서도 겸재 그림에 꽤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요. 이 그림은 오른쪽에서부터 금강산 주변, 단발령이 있는 금강산 입구, 장안사를 시작으로 한 금강산 주요 지역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겸재 정선’ 기획전 1부 ‘진경에 거닐다: 겸재 정선 진경산수화’ 전시실 전경. 호암미술관

‘겸재 정선’ 기획전 1부 ‘진경에 거닐다: 겸재 정선 진경산수화’ 전시실 전경. 호암미술관

금강산에서 이어지는 관동의 명승지를 담은 ‘관동명승첩’(11폭)은 63세인 1738년 친척 동생인 우암 최창억을 위해 그린 겁니다. 총석정·삼일호·죽서루·망양정 등 겸재가 모든 그림에 직접 제목과 ‘겸재’라는 호를 쓰고 낙관을 찍은 데다 제작연대를 밝히는 기록이 있는 기년작으로 의미가 크죠. 옛 그림은 확실한 제작연대를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거든요.

무대는 금강산과 관동에서 한양과 근교로 옮겨집니다. 겸재는 숙종 말년에 한양의 백악산 서쪽 장동, 지금의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 일대에서 태어났어요. 지방서 관직을 했던 시기를 제하면 평생 한양에 살았던 그는 한양을 그린 그림도 여럿 남겼습니다. 특히 장동의 경우 주요 경치 8곳을 골라 두 번에 걸쳐 화첩을 만들었는데 구성이 약간 달라 비교하는 재미가 있죠. 자하동·청송당·대은암·독락정·취미대·청풍계·수성동·필운대를 그려 76세경 만든 ‘장동팔경첩’은 간송미술문화재단이, 대은암·청풍계·청송당·독락정·취미대·창의문·백운동·청휘각을 그려 80세 초반 만든 ‘장동팔경첩’은 국립중앙박물관이 각각 소장하고 있는데, 이번 전시에선 둘 다 볼 수 있어요.

그간 보기 힘들었던 그림으로 ‘연강임술첩’(1742)을 빼놓을 수 없죠. 북송대 지식인 소식의 ‘적벽부’가 집필된 해(1082)와 같은 임술년, 양천현령 겸재가 경기도관찰사 홍경보의 초청으로 연천현감 신유한과 연강(임진강)에서 뱃놀이하고 그린 이 화첩은 홍경보의 서문과 신유한의 ‘의적벽부’ 글을 더해 총 셋을 만들어 나눠 가졌죠. 하나는 행방을 알 수 없고, 홍경보본과 겸재본만 남았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함께 걸려 비교하며 볼 수 있게 됐어요. 뱃놀이의 시작인 ‘우화등선’과 마치는 ‘웅연계람’은 가로가 길게 그려져 뱃놀이의 여정을 모두 아우르는 듯하죠.  

겸재의 임진강(연강) 기행 그림첩 ‘연강임술첩’의 전시 영역. 호암미술관

겸재의 임진강(연강) 기행 그림첩 ‘연강임술첩’의 전시 영역. 호암미술관

1741년 겸재는 친구 이병연으로부터 시와 그림을 서로 바꾸어보자는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 제안을 받습니다. 이에 한강을 비롯해 서울의 빼어난 경치와 다양한 고사를 그리고 시를 엮어 ‘경교명승첩’을 만들죠. 원래 1권이었으나 현재는 상·하 2권으로 나뉘어 각각 19·14점이 전합니다. ‘인왕산 골짜기의 집’이란 뜻으로 겸재가 살던 집을 그린 ‘인곡유거’, 그가 현령으로 있던 ‘양천현아도’를 비롯해 ‘압구정’ ‘송파진’ 등 지금과 사뭇 다른 옛 서울의 모습을 진경산수로 그렸죠. ‘압구정’ 그림 속 오른쪽 짙은 녹색 산은 남산인데요. 그 꼭대기에는 애국가에도 나오는 ‘남산 위 저 소나무’가 자리하고 있죠. “이 소나무는 한국전쟁까지도 있었다고 해요.” 김 연구원의 말에 김도연·김태린·서진하 학생기자는 ‘서빙고망도성’ 등 서울 풍경을 담은 다른 그림도 유심히 살피며 남산과 소나무를 찾아다녔죠.

다른 그림도 잘 그린 진경산수화의 대가

금강산과 한양 외에도 전국 각지의 명승지를 그린 겸재의 진경산수화를 한참 감상한 뒤에는 그의 다른 면모를 살펴봤습니다. 앞서 본 ‘경교명승첩’에는 다양한 옛이야기를 토대로 한 고사인물도도 실렸는데요. ‘어초문답’ ‘고산상매’ 등 중국의 고사를 소재로 하면서 조선의 모습으로 바꿔낸 겸재 특유의 진경식고사도를 볼 수 있죠. 당나라 시인 백거이와 그의 집을 그린 ‘여산초당’ 역시 진경산수화풍으로 배경을 그려놓고 산 아래서 초당을 오르는 동자는 중국풍으로 그렸죠. 이 그림은 6월 1일 이후 ‘여산폭’으로 교체됩니다. 진경산수화를 그리면서도 그는 중국 문인화가들의 남종화 필법을 활용해 문인화풍의 산수화 유행에 한몫했어요.  

겸재 정선의 흔치 않은 인물화이자 자화상으로 추정되는 ‘독서여가도’(경교명승첩·간송미술문화재단).

겸재 정선의 흔치 않은 인물화이자 자화상으로 추정되는 ‘독서여가도’(경교명승첩·간송미술문화재단).

또 겸재의 자화상으로 추정되는 ‘경교명승첩’ 상권의 첫 작품 ‘독서여가도’, 이병연과 자신의 이야기를 그린 ‘시화환상간도’, 우리나라 그림으로는 드물게 무지개를 그린 ‘홍관미주도’ 등도 눈길을 끕니다. 함께 실린 이병연의 시는 번역돼 있어 감상에 도움이 되죠. 인곡유거·독서여가도의 경우 겸재로 추정되는 인물 뒤로 책이 쌓여있는데요. 독서여가도는 책을 읽다 부채를 쥐고 툇마루로 나와 앉아 앞에 놓인 화초를 감상하는 문인의 여가생활을 그대로 그렸죠. 김 연구원은 “여러 고사를 그림 소재로 한 것 역시 문인으로서 지식을 갖춘 것을 은연중에 나타낸 것”이라고 귀띔했어요.

겸재의 집안은 오랜 양반 가문이기는 했으나 직계로는 증조부부터 초시(과거의 첫 시험)도 거치지 못하고 아버지도 일찍 여의는 등 집안이 쇠락했어요. 소년 가장으로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겸재는 당시 명문가였던 외갓집의 도움으로 글공부를 했지만 그 역시 초시를 거치지 못했죠. 다만 학자이자 당대의 시인으로 꼽힌 김창흡의 제자가 되고, 예술적 소양이 풍부한 사천 이병연, 관아재 조영석 등과 막역한 벗으로 지내면서 상부상조하고, 한동네에 대대로 살던 안동김씨 가문의 후원을 받고 시·서·화 특히 그림에서 재주를 꽃피우며 신묘년풍악도첩·(전)해악전신첩으로 일약 문예계의 스타로 떠올랐죠. 비록 41세에 이르러서야 추천을 받아 관직에 나갔지만, 후에는 경학 시험을 통과하고 영조의 배려로 대우를 받아 40여 년간 지방수령을 비롯한 여러 관직을 지냈어요. 사후에는 영조의 지시로 정2품 한양판윤에 추증됩니다.

‘인왕산 골짜기의 집’이라는 뜻으로 겸재 정선이 살았던 인왕산의 집을 그린 ‘인곡유거’(경교명승첩·간송미술문화재단).

‘인왕산 골짜기의 집’이라는 뜻으로 겸재 정선이 살았던 인왕산의 집을 그린 ‘인곡유거’(경교명승첩·간송미술문화재단).

문인으로서 겸재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은 ‘퇴우이선생진적첩’입니다. 겸재가 그린 그림 4면과 퇴계 이황 친필의 ‘회암서절요서’ 초본, 이를 보고 쓴 우암 송시열의 발문, 겸재의 둘째 아들 정만수의 발문, 이병연의 제시가 합쳐진 서화첩이죠. 제목의 ‘퇴우이선생’은 유학자 이황과 송시열의 아호 ‘퇴계’와 ‘우암’의 첫 글자를 딴 겁니다. 이황이 쓴 서문은 손자인 이안도, 이안도의 외손자 홍유형을 거쳐 사위인 박자진이 받았는데요. 그는 이 글을 송시열에게 보여주고 발문을 받았죠. 박자진의 외손자가 바로 겸재입니다. 이 내력은 정만수의 발문에 나와요.

겸재는 여기에 이황의 도산서당을 그린 ‘계산정거’, 박자진이 송시열을 찾아 발문을 요청하는 장면을 그린 ‘무봉산중’, 박자진의 집을 그린 ‘풍계유택’, 본인의 집을 그린 ‘인곡정사’를 차례로 담았죠. 김 연구원은 “퇴계 이황에서부터 이어진 문인의 뿌리를 강조하고 자신의 집안에 대한 자부심을 보여 주는 예로 매우 중요하다”고 했죠. 화첩 형태라 한 번에 한 점밖에 전시를 못하다 보니 옆에 디지털 화첩을 마련해 하나씩 확대해가며 전부 살펴볼 수 있게 했는데요. 계상정거의 경우 크기는 작지만 대표작으로 꼽히는 데다 1000원권 화폐 뒷면 그림이기도 하다 보니 관람객들이 줄 서서 보기도 했죠.

겸재가 자신의 집안에 대한 기억과 자부심을 보여 주는 예로도 중요한 ‘퇴우이선생진적첩’(삼성문화재단)에 실린 ‘계상정거’는 이황의 도산서당을 그린 것으로 1000원권 화폐 뒷면 그림이기도 하다.

겸재가 자신의 집안에 대한 기억과 자부심을 보여 주는 예로도 중요한 ‘퇴우이선생진적첩’(삼성문화재단)에 실린 ‘계상정거’는 이황의 도산서당을 그린 것으로 1000원권 화폐 뒷면 그림이기도 하다.

주변에 흔한 꽃과 새, 곤충과 풀·나무, 동물과 풍경 등을 그린 화훼영모화도 눈길을 끌어요. 금방이라도 솔방울을 들고 가버릴 것 같은 다람쥐(겸현신품첩)는 물론, 오이를 이고 가는 고슴도치(자위부과도), 겉날개는 물론 속날개까지 투명하게 그려진 매미(송림한선도) 등의 섬세한 묘사가 소중 학생기자단의 탄성을 이끌어냈죠. ‘화훼영모첩’ 원화는 내년 대구간송미술관에서 이어질 겸재 정선 전시에 선보일 예정이라 디지털 화첩으로 살펴봤습니다.

사대부의 충절과 더불어 십장생 중 하나로 장수를 의미하는 소나무 그림에 이어 겸재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의 그림까지 둘러본 뒤 전시를 기획한 조지윤 리움미술관 소장품연구실장을 만난 소중 학생기자단은 “이렇게 대규모 겸재 정선 전시를 기획한 계기가 궁금하다”며 질문을 쏟아냈어요. 조 실장은 “워낙 유명한 화가이기에 회화 큐레이터라면 한번쯤 마음에 둘 만하다 보니 그간 겸재 정선을 다룬 전시는 많았지만, 명성에 비해 그의 작품세계를 총망라하는 전시는 없었다”며 “저 역시 오래 품었는데, 내년 겸재 탄생 350주년, 올해 삼성문화재단 창립 60주년 등 상황이 뒷받침되며 약 3년 정도 준비해 그간의 아쉬움을 지울 대규모 전시를 선보이게 됐다”고 말했죠.  

‘사직송’(고려대학교박물관)은 노송 한 그루만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 드문 사례로, 실제 사직단에 있는 소나무를 그린 것이어서 매우 흥미롭다.

‘사직송’(고려대학교박물관)은 노송 한 그루만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 드문 사례로, 실제 사직단에 있는 소나무를 그린 것이어서 매우 흥미롭다.

“작품을 모으기도 힘들었을 것 같다”고 한 태린 학생기자는 “대표작 165점은 무슨 기준으로 고른 건지, 그중에서도 제일 앞에 둔 두 작품을 고른 이유”를 알려달라고 했죠. 조 실장은 “겸재의 예술세계를 전체적으로 보여주고자 했기에 여러 기관과 개인 소장가들의 도움을 받아 대표작인 진경산수화는 물론 사대부의 정취를 보여주는 관념산수화, 옛 선인들의 이야기를 그린 고사인물화, 동식물을 그린 화훼영모화 등 다양한 장르에서 유명한 명품 위주로 선정했다”며 “그중에서도 특히 대표작으로 꼽히고 국보로도 지정되고 대중이 실제로 보고 싶어 하는 인왕제색도·금강전도를 맨 앞에 전시했다”고 설명했어요.

“진경산수화란 정확히 어떤 장르인지” 아리송하다는 진하 학생기자에게 조 실장은 “한마디로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그린 것으로 겸재는 자신만의 개성과 시각을 더해 진경산수화를 대성했다”고 했죠. “옛 그림은 풍경을 그릴 때 실제 모습이 아닌, 머릿속으로 상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렸어요. 이를 관념산수화라고 하죠. 여기서 이제 실제 풍경도 아름답다며 우리나라 명승지를 담은 실경산수화를 그리는 움직임이 나타나요. 진경산수화는 실경산수화의 흐름을 토대로 우리 산천 풍경을 그리되, 자신만의 필법으로 재구성한 겁니다. 아까 전시장에서 본 ‘비로봉’을 예로 들면, 실제 비로봉의 모습을 담되, 금강산 최고봉답게 구도와 크기, 표현 방식에서 주변 암석보다 훨씬 더 크고 웅장하게 그려냈죠.”

청소년 감상 프로그램 워크시트에 실린 ‘계상정거’와 실제 1000원권 지폐를 비교해본 김태린 학생기자.

청소년 감상 프로그램 워크시트에 실린 ‘계상정거’와 실제 1000원권 지폐를 비교해본 김태린 학생기자.

도연 학생기자는 “많은 금강산 그림 중 금강전도가 최고로 꼽히는 이유”와 더불어 “금강전도·인왕제색도 모두 사진으로 봤던 실제 모습과 좀 다른데 기법 때문인 건지” 궁금하다고 했죠. “금강전도는 금강산 전체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부감시로 그렸는데, 비행기도 드론도 없던 시절에 이렇게 그린 건 금강산을 돌아다니며 하나하나 그 경치를 마음에 담아뒀다 재구성한 것으로, 화가로서의 기억력과 창의성, 구성능력 등이 탁월한 것을 잘 보여줘요. 부감시는 전에도 있던 기법이지만, 겸재만큼 극적으로 표현한 경우는 별로 없죠. 또 뾰족한 돌산은 수직으로 쓸어내리듯, 나무들은 옆으로 붓을 긋는 독특한 기법도 다양하게 사용했고요.”

조 실장은 이어 인왕제색도에 관해 설명했죠. “앞서 말했듯, 겸재는 실제 풍경에 자신의 경험과 개성을 더해 진경산수화를 그렸는데요. 여러 번 갔던 금강산을 그린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평생을 인왕산 기슭에 살던 겸재가 인왕산을 정말 많이 보고 이를 자기식으로 표현해 실제 모습과 약간 다릅니다. 비를 맞은 암벽을 검게 칠한 것도 한 예죠.”

주의 깊게 듣던 진하 학생기자가 “진경산수화 외에 겸재가 가장 잘 그린 그림은 무엇이고, 겸재의 그림 기법이나 화풍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은 뭔지” 질문했어요. “전시로 봤듯 겸재는 다양한 장르를 그렸고, 또 대부분 잘 그렸다”고 운을 뗀 김 연구원은 “굳이 꼽자면 2층에서 본 여산초당처럼 옛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고사도를 자신의 상황, 조선의 풍습 등에 맞게 의도적으로 변형해 친숙하게 그리며 자신의 문인적 면모 또한 내비친 것을 들 수 있다”고 했죠.  

‘겸재 정선’ 기획전을 통해 겸재의 예술세계를 탐방한 서진하·김도연·김태린(왼쪽부터) 학생기자가 호암미술관 앞에서 겸재의 진경산수화 속 인물처럼 주변 경관을 둘러보고 포즈를 취했다.

‘겸재 정선’ 기획전을 통해 겸재의 예술세계를 탐방한 서진하·김도연·김태린(왼쪽부터) 학생기자가 호암미술관 앞에서 겸재의 진경산수화 속 인물처럼 주변 경관을 둘러보고 포즈를 취했다.

김 연구원은 이어 “겸재는 문인으로서 그림을 그린 문인화가로 그림을 전업으로 한 직업화가, 도화서 화원 등에 소속된 화가와는 약간 달라요. 문인화가와 직업화가는 양반 사대부와 중인으로 신분 차이도 있고, 그림 기법 등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문인화가는 보통 먹을 위주로 그리지만 직업화가는 다양한 색채를 썼죠. 다만 겸재는 이러한 기법도 다양하게 받아들여 색도 화려하게 쓰기도 하고, 문인화에 잘 쓰지 않는 무지개를 그리면서까지 그림 주제를 살리려고 노력하기도 했죠. 겸재의 기법 특징 중에는 붓을 옆으로 뉘어 타원형 점을 찍어 표현하는 미점이 있는데, 이로써 나무도 그리고 흙산도 표현하는 등 다양하게 활용했죠”라고 덧붙였어요.

태린 학생기자는 “기획자로서 꼽는 이 전시 하이라이트 작품, 사람들이 실제로 오래 감상하는 작품, 저희 또래 어린이·청소년이 좋아하는 작품이 궁금하다”며 전시 관람법을 추천해달라고 했죠. 조 실장은 “대표작 중에서도 대표로 꼽히는 인왕제색도·금강전도를 비롯해 전시에 나온 모든 작품이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도 “예술가로서의 겸재, 문인으로서의 겸재를 아울러 보여주는 퇴우이선생진적첩을 주의 깊게 보면 좋겠다”고 했죠. 전시 구성에 있어서도 퇴우이선생진적첩은 자세한 설명과 디지털 미디어 전시물까지 알차게 마련됐어요.  

친구 사천 이병연과의 약속으로 한강을 비롯하여 서울의 빼어난 경치와 다양한 고사를 그려 만든 ‘경교명승첩’(간송미술문화재단)에 실린 ‘압구정’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일대의 옛 모습을 담았다.

친구 사천 이병연과의 약속으로 한강을 비롯하여 서울의 빼어난 경치와 다양한 고사를 그려 만든 ‘경교명승첩’(간송미술문화재단)에 실린 ‘압구정’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일대의 옛 모습을 담았다.

“아무래도 인왕제색도·금강전도가 가장 인기고, 여러분 또래의 경우 의외로 고사인물도를 좋아해요. 아마 색도 화려하고, 이야기가 곁들여져선지 재밌게 보는 것 같아요. 겸재는 교과서에도 나오고 조선 후기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주는 작가이기도 해 예술 감상의 즐거움은 물론 역사 공부 등 여러 면에서 어린이·청소년들이 많이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작품 시기별로 변화를 따라가도 재밌겠지만, 서울에 산다면 압구정·송파진·세검정 등 주변 동네 찾기처럼 자기에게 흥미로운 그림을 찾아보는 것도 재밌을 거고요. 워낙 유명한 그림들이다 보니 한 번은 그림만 보고, 인터넷이나 책 등을 찾아 그림에 대해 알아본 뒤 다시 한 번 보는 것도 추천해요. 또 진경산수화만 보고 넘어가지 말고, 뛰어난 관찰력과 세밀한 묘사가 돋보이는 화훼영모도·초충도 등 그의 새로운 면모도 살펴보면 좋겠네요.”
동행취재=김도연(경기도 유현초 6)·김태린(경기도 유현초 6)·서진하(경기도 홈스쿨링 중1) 학생기자 

겸재 정선  

장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에버랜드로562번길 38 호암미술관   
기간: 6월 29일까지(5월 5일은 ‘인왕제색도’ 교체 전 마지막 연휴로 개관) 
관람시간: 오전 10시~오후 6시(월요일 휴관, 매표 마감 오후 5시) 
관람료: 성인 1만4000원, 청소년(만 7~24세)·노인(만 65세 이상) 7000원, 2주 전부터 홈페이지 예약 


 

소중 학생기자단 취재 후기
첫 취재로 조선 시대에 겸재 정선이라는 화가가 있는 것을 알고 떨리는 마음으로 호암미술관에 갔습니다. 막상 취재해보니 잘 몰랐던 내용인데도 즐겁고 재미있었죠.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겸재 정선은 살아있을 때도 유명했는데요. ‘금강전도’와 같은 대표작을 보며 이렇게 큰 그림을 어떻게 다 그렸나 궁금했고, 예전 다녀온 금강산을 기억해 그리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다른 대표작인 ‘인왕제색도’도 마찬가지였죠. 인왕산은 겸재 정선이 많이 보고 그려봤기 때문에 눈감고도 그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겸재 정선의 작품을 실제로 보니 너무 멋졌고, 그림 속에 많은 뜻과 역사가 담겨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작품과 관련해 김규태·조지윤 큐레이터님의 이야기를 듣고 취재하는 것은 정말 보람 있었습니다.
-김도연(경기도 유현초 6) 학생기자

호암미술관에서 열리는 ‘겸재 정선’ 전시회를 취재했습니다. 이름만 알고 있던 조선시대 화가이자 문인인 겸재 정선에 대해 배우고 그의 다양한 작품을 직접 볼 수 있어 더욱 뜻깊었죠. 겸재 정선을 다룬 최대 규모로 전시로, 금강산부터 동해, 한양의 남산과 압구정 등 조선 시대의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들을 통해 그 시절을 엿볼 수 있었어요. 또 섬세한 묘사로 그의 정교한 표현력을 느낄 수 있었죠. 특히 미술에 관심은 크지만 큐레이터라는 직업에 대해 잘 몰랐던 터라, 해설을 듣고 인터뷰도 진행하며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전시 기획 단계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의 노력이 있었다는 점, 겸재의 삶과 작품 이야기도 깊은 인상을 남겼죠.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설명을 듣고 그림 속 산 위의 큰 나무를 찾아본 것도 기억에 남아요.  
-김태린(경기도 유현초 6) 학생기자

‘겸재 정선’ 특별전은 제 첫 취재였어요. 금강산 그림이 한 코너를 이룰 정도로 겸재는 금강산을 정말 좋아했나 봅니다. 금강산에 6~7번 갔다는데 그때는 카메라나 휴대전화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직접 본 것을 기억해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게, 또 자기만의 스타일로 잘 그린 게 신기했어요. 그림 속 곳곳에 집·정자· 절·사람 등이 숨은그림처럼 자리 잡고 있는 것도 재밌었죠. 가장 유명한 그림이자 국보인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를 직접 볼 수 있어서 정말 뿌듯했습니다. 겸재가 진경산수화 외에 동물·곤충·새 등도 그렸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시인인 친구 사천 이병연과 서로 그림과 시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나눈 모습을 보며 부럽기도 했답니다.
-서진하(경기도 홈스쿨링 중1) 학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