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 손절, 푸틴 포섭 공식화…트럼프 바라보는 김정은이 움직인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러시아 파병을 공식 인정하고 '혈맹'으로 싸웠다고 선언한 건 향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담판까지 염두에 둔 포석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새로운 대미 '빅 딜'을 노리는 김정은이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남측과는 관계를 끊고 러시아를 뒷배로 확보하려는 포석일 수 있어서다.

지난 1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 서부 쿠르스크 지역에서 북한 군인 2명을 생포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공개한 생포된 북한 군인. 젤렌스키 대통령 엑스 캡처

지난 1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 서부 쿠르스크 지역에서 북한 군인 2명을 생포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공개한 생포된 북한 군인. 젤렌스키 대통령 엑스 캡처

종전 앞두고 파병 지분 확보

28일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입장에 따르면 북한은 "러시아 쿠르스크 지역 해방작전에 참전해 영웅적 위훈을 세웠다"고 자평하며 "러시아 연방과 같은 강력한 국가와 동맹을 맺은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며 파병을 처음으로 공식 확인했다.

이를 두고 트럼프가 줄곧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협상을 다그치는 가운데 트럼프의 지속적 관심 표명에도 제대로 반응하지 않던 김정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결렬로 끝난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우군 없이 트럼프를 상대했다가 면전에서 퇴짜를 맞은 전력을 고려할 때 러시아를 동맹으로 확보하는 게 유리하다는 계산으로 보인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트럼프는 러시아를 종전 협상에 끌어들이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만약 종전이 전격적으로 성사된다면 북한은 제대로 된 대가를 손에 쥐지 못하고 소외될 수 있다"며 "이에 반대급부를 확실히 얻어내기 위한 결산 작업의 일환으로 파병을 공식화, 정당화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측 단절→북·러 동맹 쐐기

김정은이 러시아 파병을 공식 인정하기 전 대남 단절 조치에 속도를 낸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김정은은 지난 25일 처음으로 '중간계선해역'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남북을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한 이후 기존 북방한계선(NLL)을 부정하고 북한만의 새로운 남북 해상경계선을 주장한 것이다.


북한 조선중앙TV는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5,000t급 신형다목적구축함 '최현호' 진수식이 지난 25일 남포조선소에서 진행됐다고 26일 보도했다. 배에 오른 김정은과 딸 주애가 팔짱을 낀채 구내를 돌아보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북한 조선중앙TV는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5,000t급 신형다목적구축함 '최현호' 진수식이 지난 25일 남포조선소에서 진행됐다고 26일 보도했다. 배에 오른 김정은과 딸 주애가 팔짱을 낀채 구내를 돌아보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2018~2019년 남·북·미 간 연쇄 정상회담이 이어질 때 한·미가 한 편이 돼 북한을 상대하는 구도였다면, 김정은이 2차전을 앞두고는 북·러가 연합해 미국을 상대하는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일 수 있다. 이를 위해선 단절 조치를 통해 먼저 한국을 협상판에서 제거하는 게 유리하다고 볼 여지가 크다. 실제 북한은 이번에 파병을 인정하며 북·러 조약을 정당화, 러시아의 한반도 개입 가능성까지 열어뒀다. 

이럴 경우 북한과 러시아를 개별적으로 압박해 각개격파식으로 협상력을 높이는 게 유리한 트럼프의 셈법은 복잡해질 수 있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북한과 러시아가 서로를 동맹이라 부르며 든든한 지원세력이 있음을 과시한 것은 대미 협상력을 높이려는 의도에서 '동맹 쐐기 박기'에 나선 것"이라며 "파병 사실을 러시아와 북한이 잇따라 인정하면서 북·러를 갈라놓으려는 트럼프의 시도는 한층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희생만 하고 소외될 가능성도 

다만 김정은의 구상이 뜻대로 흘러갈지는 미지수다. 아직까지 인적·물적 교류 증가 외에 러시아가 북한에 핵잠수함,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재진입, 핵탄두 소형화 관련 핵심 기술을 넘겨준 정황은 포착되지 않았다. 정부 소식통은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상 5개 핵보유국(P5) 중 하나인 러시아가 레드라인을 넘으면서까지 북한에 기술을 넘겨줄지는 미지수"라고 설명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당장은 북한을 우군화하는 모양새지만, 트럼프와의 협상 상황에 따라 북한이 하나의 협상 카드로 전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정은으로서는 병사들이 치른 희생의 대가도 챙기지 못한 채 강대국 간 협상 판에서 밀려날 여지도 있는 셈이다.

정세 격변이 예상되는 가운데 한국 역시 경계심을 늦춰선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날 "러·북은 그간 국제사회의 수많은 지적과 일관된 증거 제시에도 불구하고 북한군 파병을 부인하거나 회피했다"며 "이제서야 파병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면서 이를 국제법에 전적으로 부합된다고 주장하고 나선 건 여전히 국제사회를 우롱하는 것으로서 이를 강력히 규탄한다"고 밝혔다.

통일부·국방부도 각각 "(파병은)북한이 젊은이들을 정권의 안위를 위해 무참히 희생시킨 반인권·비윤리적인 행위", "북한의 파병 인정은 스스로 범죄 행위를 자인한 것"이라는 입장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