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고 독창적인 조선민화, 피카소 전혀 부럽지 않습니다"

김세종 평창아트 대표는 전시와 집필을 통해 궁중민화 외에도 흥미진진하고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걸작이 있다는 것을 널리 알리는데 앞장서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김세종 평창아트 대표는 전시와 집필을 통해 궁중민화 외에도 흥미진진하고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걸작이 있다는 것을 널리 알리는데 앞장서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김세종 민화 컬렉션을 집대성한 대형 화집. 사진 아트북스]

김세종 민화 컬렉션을 집대성한 대형 화집. 사진 아트북스]

조선 민화 수집과 전시, 그리고 민화 관련 책 출간···. 어느 대학 교수의 이력이 아니다. 국내 대표 민화 컬렉터 김세종(69)평창아트 대표가 해온 일이다. 30대 초반에 우연히 민화를 처음 보고 잠을 못 이뤘지만, 그때만 해도 그는 자신의 삶이 여기까지 올 줄 몰랐다.

2018년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과 세종문화회관,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대규모 컬렉션 전시를 연 그가 최근 4권으로 구성된 대형 컬렉션 화집 『판타지아 조선민화』(아트북스)를 펴냈다. 『컬렉션의 맛』, 『나는 조선민화 천재화가를 찾았다』에 이은 세 번째 출간이다. 

미술품 수집과 민화에 대한 그의 경험과 생각을 담은 전작과 달리『판타지아 조선민화』는 자신의 컬렉션을 집대성한 도록이다. 그는 1000여점에 달하는 자신의 민화 소장품 중 일부를 주제에 따라 화조도, 산수도, 책거리·문자도, 호랑이·무신도 등 4권으로 나누고, 다양한 각도로 들여다 볼 수 있게 편집했다. 이게 끝이 아니다. 오는 6월엔 새 책 『나는 조선민화에서 순수미술을 보았다』가 또 나온다. 컬렉터의 활동으론 국내에서 선례를 찾기 어려운 광폭 행보다. 

"지금도 민화를 들여다보면 기발한 발상과 표현에 감탄하며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는 그는 "세상에 널리 알려야 할 한류의 정수가 이 안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25일 그를 서울 평창동에서 만났다.  

컬렉션 도록을 4권으로 냈다.   
컬렉터로서 내가 나중에 박물관을 열지는 못해도 이것까지는 꼭 하고 싶었다. 백 마디 말이 무슨 소용 있겠나. '자, 봐라!' 외치는 마음으로 그동안 내가 혼자 보고 감탄한 작품을 족집게로 집어내 보여주고 싶었다. 영문 글도 함께 실었는데, 이 도록을 적어도 세계 100곳의 유수 미술관에 보내는 게 내 바람이고 목표다. 
 


민화의 어떤 점을 드러내고 싶었나. 
"재기발랄한 창의성이다. 익명의 화가들이 그렸다고 전문가들은 순수 미술로 인정하기보다 서민들의 민예품 정도로 여겼지만, 민화는 볼수록 환상적이고 불가사의한 미의 세계다. 화가 낙인은 없었지만, 분명히 천재적인 실력을 갖춘 이들이 있었다."
 

김세종 컬렉션에 있는 책거리 민화의 일부. 그는 책거리 화가를 주제로 2022년 『나는 조선민화 천재화가를 찾았다』를 출간했다. [사진 김세종]

김세종 컬렉션에 있는 책거리 민화의 일부. 그는 책거리 화가를 주제로 2022년 『나는 조선민화 천재화가를 찾았다』를 출간했다. [사진 김세종]

미국 시가고미술관 소장품 도록에 실린 조선 책거리 민화.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미국 시가고미술관 소장품 도록에 실린 조선 책거리 민화.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어떤 기준으로 작품을 모았나.   
독창성과 회화성, 그리고 예술적 완성도를 기준으로 봤다. 단순히 도상학적인 분류를 따르기보다 순수 회화의 관점에서 완성도가 뛰어난 것을 모았다. 그 과정에서 일부 순수 민화는 궁중 민화보다 훨씬 더 예술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민화(民畫)는 조선시대 서민들이 생활에서 즐겨 그린 실용적인 그림을 말한다. 자유로운 형식과 대중적인 주제를 다뤄 한국인의 정서와 생활 문화를 반영하지만, 그 예술성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최근 민화 전시가 많아졌지만, 곱게 그려진 궁중 민화의 비중이 큰 편이다. 김씨는 "지금이라도 이 고정관념을 깨야 한다. 주목받지 못한 민화 가운데 피카소 그림이 전혀 부럽지않게 자유분방하고 흥미진진한 작품들이 꽤 있다"고 강조했다.

충남 보령이 고향인 김 대표는 10대에 홀로 상경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충무로에서 광고기획 일을 했다. 1980년대 아파트 분양이 활발할 때 사업이 잘돼 일찍 경제적 안정을 이뤘다. 평소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20대 후반부터 틈만 나면 박물관과 미술관에 다녔고 고미술 회화와 도자기 등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수집 초반엔 사기를 당해 한 달 만에 아파트 두 채 값을 날리기도 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2000년 6월 평창아트 갤러리를 열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민화를 수집하게 된 건 갤러리를 차린 이듬해 한 수집가의 컬렉션 수 백점을 넘겨받으면서다. "처음엔 유치하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게 볼수록 재미있는 거예요. 현대적인 아름다움도 보이고요. 그때부터 민화를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했죠." 

김세종 조선민화 컬렉션에 포함된 작품들. [사진 김세종]

김세종 조선민화 컬렉션에 포함된 작품들. [사진 김세종]

컬렉터 김세종씨가 수집해온 조선 민화. [사진 김세종]

컬렉터 김세종씨가 수집해온 조선 민화. [사진 김세종]

김세종 컬렉터는 조선의 무신도 역시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사진 김세종]

김세종 컬렉터는 조선의 무신도 역시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사진 김세종]

민화의 매력은.  
상상력과 표현의 자유분방함이다. 대나무, 새우, 억수로 내리는 비, 집과 사람도 그 안에선 상상 초월한 표현들이 넘친다. 화가들이 이름을 남기지 않은 게 오히려 장점이 됐다고 본다. 
 
김씨는 "앞서 화가 이우환, 운보 김기창, 권옥연, 건축가 유동룡(이타미 준)등 일찍이 민화의 멋과 아름다움에 주목한 예술가들이 여럿 있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이우환 화백은 일찍이 민화를 ‘추상적인 환상(abstract fantasy)’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민화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이 화백은 1975년 일본 강담사에서 『구조로서의 회화-이조의 민화에 대해서』를 냈으며, 2001년 평생 모은 민화 120여 점을 프랑스 기메동양박물관에 기증했다. 

그런데 왜 민화의 예술성은 널리 인정받지 못했을까. 김씨는 그 이유를 "애호가 따로, 학자 따로였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또 "궁중 장식화와 일반 민화를 한 범주로 본 것도 걸림돌이 됐다"고 덧붙였다. 특히 미술사가들은 민화를 실용적인 회화로만 보며 도상의 상징 해석에만 매달렸다는 것. 김씨는 또 "무신도 역시 귀신 그림으로 치부되며 회화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며 "무신도를 신앙의 관점에서만 보지 않을 때 작품이 비로소 보인다"고 덧붙였다.  

김씨의 민화 컬렉션은 컬렉터의 역할에 대한 오랜 성찰과 고민의 결과이기도 한다. "민화를 본격적으로 수집하기까지 내가 왜 모아야 하나, 정말 수집할 만한 가치가 있나, 지속해서 수집한다면 다른 수집가나 기관이 이미 소장한 작품과 어떻게 달라야 하나 고민했다"는 것. 이어 "민화가 앞으로 얼마나 더 인정받을 수 있는지, 또 내가 수집을 통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도 생각했다"고 했다. 

김 대표는 "사람들은 비싼 작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을 '컬렉터'라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컬렉터는 남이 못 알아보는 것, 거기서 진정한 미적 가치를 찾아내 그것을 미래의 유산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멀지 않은 미래에 내 민화 컬렉션을 세계적인 미술관에서 꼭 전시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