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요새 어려운데, ‘한국인이 갑자기 바보가 되어서’일까요? 아닙니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리더십을 발휘할 기회가 없어서’입니다.”
삼성전자 반도체 ‘초격차’를 만든 권오현 전 회장의 직격이다. 그는 삼성전자가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 주도권을 놓친 이유에 대해서도 “한 마디로 리더십의 능력 부족”이라고 말했다. 권 전 회장은 1985년 삼성전자에 반도체 연구원으로 입사해 2008년 반도체총괄 사장, 2012년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에 올랐다. 2017년 삼성전자가 인텔을 제치고 세계 1위 반도체 기업에 오르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고, 이후 삼성종합기술원 회장을 역임했다.

권오현 전 삼성전자 회장이 29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과학기술회관에서 열린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특강에서 강연하고 있다. 사진 심서현 기자
“리더가 실패 막으면, 조직은 아무 일 안 해”
그는 “한국 조직장들이 ‘패스트 팔로워(빠른 추격자) 성공의 덫’에 잡혔다”라고 지적했다. 후발 주자인 한국이 선두 국가·기업을 재빨리 베끼며 성장한 시대에는 실수를 줄여 시간·돈을 아끼는 게 중요했지만, 지금과 같은 AI 시대에는 베낄 정답이 없다는 거다. 권 전 회장은 “카피할 게 없는데 실수를 안 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라며 “그게 지금 한국 최대의 문제”라고 진단했다.
그는 리더의 ‘권한 이양’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국의 리더들은 대개 권한을 나눠줄 때 발생하는 비효율과 실수를 참지 못하고 꼼꼼히 지시·관리·점검을 하는데, 그러면 구성원들이 지시만 기다리며 실력이 늘지 않는다는 것. 권 전 회장은 “이제 효율로 큰 사업을 일으키는 것이 불가능해졌는데, 한국은 여전히 효율로만 움직이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젊은이들에게는 ‘질문하기’를 주문했다. 과거에는 지식 습득이 중요했지만 이제 지식으로는 AI를 이길 수 없기에, 사물의 현상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질문을 하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
사회적으로는 석·박사 인력을 충분히 배출해야 한다고 했다. 남의 기술을 베끼는 걸 넘어선 연구개발(R&D)을 하려면, 기업에 석박사 인력이 훨씬 더 많이 필요하다는 것. 최근 의대 열풍에 대해서는 “공과대학은 그들을 유인하려고 무엇을 했는지 돌아봐야 한다”라면서 “공대는 ‘시험에서 적게 틀리는 사람’을 받으려 하기보다 ‘호기심 많은 학생’을 받아서 잘 훈련할 생각을 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시스템 반도체 ‘열심히’ 아닌 판 바꿔야
그는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타이거 우즈를 골프로 이길 수 없고, ‘장기 두자’고 판을 바꿔야 한다”라며 “시스템 반도체의 성공은 판을 바꿔야 하므로, 국가적인 정책 방향을 잡고 시스템 구현을 향해 차근차근 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권오현 전 삼성전자 회장(오른쪽)이 29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과학기술회관에서 열린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특강에서 강연하고 있다. 사진 심서현 기자
이날 객석에서 삼성이 HBM에서 부진한 이유에 대한 질문도 나왔다. 권 전 회장은 말을 아끼면서도 “한 마디로 말하자면 리더십의 능력 부족”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