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시삼백수(唐詩三百首). 베이징문화출판사

회재불우(懷才不遇). 바이두
전한(前漢)의 사상가 가의(賈誼), 신라의 최치원(崔致遠), 조선의 정약용(丁若鏞) 등 동서고금에 ‘회재불우’한 인재들이 적지 않다. 당나라 말기의 시인 이상은도 여기에 포함된다.

당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 바이두
이상은의 관료 생활은 당연히 순탄하지 못했다. 실직을 반복하며 평생을 겨우 지방 관료들의 막료로 전전해야 했다. 30세에 모친을 여의었고, 설상가상으로 39세엔 사랑하는 아내 왕씨와도 사별했다. 그도 병을 얻어 향년 46세로 일찌감치 세상을 하직했다.
그가 추구한 시풍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유미주의(唯美主義)다. '무제(無題)' 시리즈 등 사랑에 빠진 남녀의 심리를 노래한 작품이 많다.
'전고(典故)'는 장자(莊子), 사기(史記), 삼국지(三國志) 등 사람들에게 익숙한 역사 속 인물이나 에피소드를 작품 안으로 도입해 주제를 암시하거나 시에 입체감을 부여하는 기법이다. 그는 이 전고에 특히 능했다. '장자가 새벽 꿈에서 나비에 홀렸던 것처럼(莊生曉夢迷蝴蝶), 촉의 망제가 춘심을 두견새에 의탁했던 것처럼(望帝春心託杜鵑).' 그의 작품 '금슬(錦瑟)'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심지어 당시 지식인들이 금기시하던 패사(稗史)나 소설에서 전고를 가져오기도 했다.
'회재불우'했던 그의 관료 이력과 대조적으로, 시인 이상은은 당대에 이미 대단한 유명인사였다. "죽으면 네 자식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 천하의 백거이(白居易. 772~846)가 그의 경지를 이렇게까지 흠모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시인 온정균(溫庭筠)도 이상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상은은 '산행(山行)'을 쓴 두목(杜牧)과 함께 '이두(李杜)'로 칭해지며, 당나라 말기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꼽힌다.

중국의 문호 루쉰(魯迅). 바이두
이런저런 시대적 한계와 제약은 있었지만, 당시 당나라엔 사회 전반적으로 이처럼 시를 애호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어떤 공동체나 세속적인 것들에 지치면 어느 순간부터 성숙한 사회에 대한 로망이 생긴다. 뿐만 아니라, 인문학이나 문학에 대한 대우를 보면 그 사회의 성숙도가 가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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