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콧 베센트 미 재무장관이 백악관에서 열린 트럼프 대통령 취임 100일 경제 성과 브리핑에서 발언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부 장관이 선거를 앞둔 한국과 일본이 “선거 전 (미국과의) 협상을 마무리(해결)하려는 의지가 강하다”고 발언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한국 정부는 30일 새벽 설명자료를 내고 “(그런) 의사를 전달하거나 논의한 적이 없다”고 강하게 부인했다.
베센트 장관은 29일 트럼프 대통령 취임 100일 경제 성과를 설명하는 백악관 공식브리핑에서 한국과 일본의 주요 선거로 협상 타결이 늦어질 가능성을 묻는 말에 “이들 정부는 선거 전에 미국과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것을 보여주기 위해 무역 협정의 틀(framework)을 완성하길 원한다고 생각한다”면서 “이들은 협상 테이블에 나와 이를 성사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선거운동(campaign)에 나서길 훨씬 더 열망(keen to)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은 6월 3일 대통령 선거를, 일본은 7월 20일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다.
베센트 장관의 발언은 그동안 “미국과 협상은 차기 정부에서 최종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해왔던 한국 정부 고위관계자들의 설명과 크게 배치된다. ‘한·미 통상협의’에 배석했던 박성택 산업부 1차관은 최근 “(미국과 협상에서) 대선 전에 뭔가 결정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정도가 아니라 ‘없다’”면서 "패키지딜이라 대선 전까지 결과물을 내는 것은 이론적으로도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이날 정부의 해명도 비슷한 맥락이다. 기재부는 이날 새벽 1시에 베센트 장관 발언과 관련한 설명자료에서 “대선 전에 미국과 협상의 틀을 마무리 짓고, 그다음 선거운동을 원한다는 의사를 전달하거나 논의한 바가 없다”고 부인했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함께 2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재무부에서 열린 '한-미 2 2 통상협의(Trade Consultation)'에서 기념 촬영하고 있다. (왼쪽부터) 안 산업부 장관, 최 부총리, 스콧 베센트 미 재무장관,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 연합뉴스
최상목 기획재정부 장관 겸 경제부총리도 이날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출석해 ‘베센트 장관이 근거 없는 말을 하는가’는 임광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질문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취임 100일 홍보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준비된 답변이라기보다는 그 자리에서 홍보용·국내용으로 발언하지 않았나 추정한다”고 말했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역시 이날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베센트 장관이 (상호관세) 유예기간 안에 협상을 끝낼 수 있다고 자신감을 나타내면서 아시아 국가들이 선거를 앞두고 빨리할 것 같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어 안 장관은 “대선 전까지 결론을 낼 수 있는 절차적 준비가 안 됐고, 그 전에 (결론을) 낸다는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밝혔다.
‘한·미 통상협의’ 이후 양측은 협상 속도를 두고 온도 차를 보여왔다. 베센트 장관은 “한국이 최선의 제안(A game)을 가져왔다”며 “예상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상황”이라고 했지만, 최 부총리 등은 “7월 8일 이전까지 관세 폐지를 목적으로 한 ‘7월(줄라이) 패키지’를 마련하고, 차기 정부에서 결정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실제 일본도 비슷한 상황에 부닥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25일 "일본과 (관세) 합의에 매우 근접했다"고 밝혔는데, 일본 NHK는 “일본 정부 내에서는 트럼프 대통령 언급 등에 대해 ‘근거를 모르겠다’ ‘국민에게 관세 효과를 호소하려는 것 아닌가’ 같은 반응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일본 등 최우방국을 대상으로 조기에 정책 성과를 내겠다는 정치적·외교적 동기가 강한 상황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일본에 빠른 결정을 재촉하는 일종의 ‘압박’의 메시지라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무역협상이 너무 오래 걸리면 그냥 관세를 정하겠다”고 했다. 한 외교 소식통은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전쟁에서 의도한 결과를 얻지 못한 데다 인플레이션·주가하락·경기침체 우려 등이 커지며 수세에 몰렸고, 이를 한국·일본 등과 빠른 협상을 통해 벗어나려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30일 서울 영등포구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중소기업 규제혁신 현장 소통 간담회’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중앙일보 김현동 2025.04.30
이런 미국의 움직임은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의 대선 출마와 시기적으로 맞물리면서 확대 해석을 낳고 있다. 민주당은 이날 서면 브리핑에서 “한 권한대행이 미국과 관세 협상을 본인의 성과로 포장해 대선 출마의 발판으로 삼으려 국익을 가져다 바치려고 했음이 확인됐다”고 몰아세웠다. 김민석 민주당 최고위원도 “(한 총리가) 국익이 걸린 관세 협상을 자기 출마를 위한 장사수단으로 악용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현 국내 상황에선 빠른 협상 타결이 유리한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 많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일반적으로 정부는 선거 국면에서 통상협상을 피하려고 하는데, 협상에서 상대국에 양보하는 게 더 부각되기 쉽고, 이에 대한 저항은 표심으로 연결될 수 있어서”라며 “실제로도 차기 정부에서 협상을 마무리 짓는 것이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길”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