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엔 AI 칩 팔고, 중국은 조이고...트럼프 ‘거래의 기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3일(현지 시간)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킹 칼리드 국제공항에서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 대화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3일(현지 시간)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킹 칼리드 국제공항에서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 대화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미국이 인공지능(AI) 반도체 수출 통제 정책의 판을 새로 짠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동맹과 적국을 구분했던 전임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을 전면 폐기하고 AI 칩을 투자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하고 나섰다. 전 세계를 상대로 중국산 AI칩 사용에 강한 경고를 날리는 한편, 바이든 정부가 AI 칩 수출 통제국으로 점찍은 사우디아라비아에는 최신 엔비디아칩을 대량 판매하는 등 트럼프식 ‘거래의 기술’이 본격화하는 모양새다.

반도체 수출 규제 전면 개편… ‘투자 협상 지렛대’ 활용

13일(현지시간) 미국 상무부 산업안보국(BIS)은 반도체 수출 규제인 ‘AI 확산 규칙’에 대해 “폐지를 공식화하는 것을 관보에 게재하고, 향후 대체 규칙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지난 1월 바이든 행정부는 전 세계 국가를 동맹, 일반 국가, 적국 등 3등급으로 나눠 AI 반도체 수출을 통제하는 규제를 오는 15일부터 시행한다고 예고했었다. 해당 AI 확산 규칙에선 한국·일본 등 주요 동맹 20개국에는 AI 반도체 수출이 무제한 허용됐지만, 중국으로의 우회 수출 우려가 있는 중동 국가 등 약 150개국에는 수출 수량이 제한됐다. 중국, 러시아, 이란, 북한 등 적성국에는 수출이 전면 금지됐다.

이날 BIS는 성명을 통해 “바이든 행정부의 AI 확산 규칙은 미국 혁신을 저해하고 기업들에 부담을 준다”며 “수십 개 국가와의 외교 관계를 2급 지위로 격하해 미국의 위상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비판했다.

중국에 대한 압박은 한층 거세졌다. 미국 상무부는 이날 별도의 가이드라인을 공개하며 “전 세계 어디에서든 화웨이의 AI 칩을 사용하는 것은 미국 수출 통제 규정을 위반하는 행위”라고 강조했다. 최근 화웨이가 엔비디아에 버금가는 성능을 가진 AI칩을 자체 개발했다는 보도가 잇따르자 중국산 반도체 칩의 확산을 막으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와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트럼프 대통령의 사우디아라비아 순방에 동행했다. AFP=연합뉴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와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트럼프 대통령의 사우디아라비아 순방에 동행했다. AFP=연합뉴스

 


트럼프, AI칩으로 중동 공략

미국이 AI 칩 수출 통제 대상을 중국으로 좁히자마자, 사우디아라비아에선 대형 거래가 성사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사우디를 방문한 13일(현지시간) 리야드에서 열린 ‘사우디-미국 투자 포럼’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자사의 최신 AI 칩 ‘GB300 블랙웰’ 1만8000개를 시작으로 향후 5년간 수십만개의 첨단 칩을 사우디에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AMD도 100억 달러(약 14조 원) 규모의 공급 계획을 밝혔다. 사우디는 미국 방산 기업들로부터 1420억 달러 규모의 무기를 구입하는 등 양국은 6000억 달러(약 850조 원) 규모의 투자·협력을 약속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사우디에 이어 방문할 카타르, 아랍에미리트(UAE)에서도 AI 칩을 활용해 투자 협약을 끌어낼 것으로 전망된다. 모두 AI 칩 수출이 제한될 뻔한 국가들이다. 미국 투자전문매체 CNBC는 “엔비디아 칩이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적 협상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반도체 규제 다시 강화될 수도”

국내 기업들도 미국의 반도체 정책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와 AMD에 고대역폭메모리(HBM)를 공급하고 있어 수출 통제가 완화될 경우 공급이 확대될 수 있다.

중동 시장을 적극 공략해온 국내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들에도 일단은 긍정적이다. 리벨리온은 지난해 사우디 아람코로부터 200억원의 전략적 투자를 유치하고 현재 AI 칩을 공급 중이다.

하지만 미국 주도의 반도체 패권을 추구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향후 국내 기업에 불리한 더 까다로운 규제를 내놓을 가능성도 여전하다. 중동에서 미국 빅테크의 입지가 커질수록 국내 팹리스 기업들이 누리던 반사이익이 줄어들 가능성도 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이번 조치는 대외적으로 전임 행정부의 업적을 지우는 정치적 판단에 가깝기 때문에 향후 다시 규제를 강화하는 오락가락 행보가 이어질 가능성도 크다”며 “반도체 품목별 규제가 아직 구체적으로 발표되지 않은 만큼 섣부른 낙관은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