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프랑스 투레트의 이성자 아틀리에 '은하수'에 16일(현지시각) 프랑스 정부의 '주목할 만한 현대건축물' 현판이 걸렸다. 사진 이성자기념사업회
조그만 내 차에 작품을 할 재료랑 필요한 것을 다 챙겨 싣고 손수 차를 몰아 새벽 4시쯤 파리를 떠난다…저녁때, 6시쯤 투레트의 내 그리운 화실에 도착한다.”(이성자, ‘파리, 투레트, 서울, 북극항로’, 「화랑」, 1985년 봄)
16일 오전(현지시각) 남프랑스의 고즈넉한 언덕 마을 투레트 쉬르루프(Tourrettes-sur-Loup), 해발 400m 남짓한 언덕길 위에 한국과 프랑스의 문화예술가 인사들이 모였다. 여기 마주 보고 있는 둥근 건물 두 채가 '은하수', 재불화가 이성자(1918~2009)가 40여년을 거주하며 작업한 아틀리에다. 프랑스 정부는 지난해 이곳을 ‘주목할 만한 현대건축물(Architecture Contemporaine Remarquable)’로 지정, 16일 공식 현판식을 열었다. 한국 작가가 설계해 완공한 작업 공간을 프랑스 정부가 공식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은 처음이다. 
이성자 화백의 손자 신평재(왼쪽)씨가 에브 루아 프랑스 문화부 건축·유산 담당관으로부터 '주목할만한 현대 건축물' 지정 기념패를 전달받았다. 사진 이성자기념사업회
은하수 입구 돌기둥 위에 은색 기념패가 놓였다. 지정 과정에 참여한 프랑스 문화부 건축ㆍ유산 담당관 에브 루아는 "단순한 거주와 작업의 기능을 넘어 예술 그 자체를 담은 공간"이라며 "건물과 자연, 동양과 서양, 개인의 기억과 역사적 맥락이 어우러진 이곳은 프랑스 안에서도 찾기 힘든 현대건축의 대표작"이라고 평가했다. 주프랑스 한국대사관의 신석홍 공사는 "한불 수교 140주년을 맞는 해에, 이성자 화백의 아틀리에가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양국 간 문화 교류의 상징적 결실"이라고 밝혔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소장품 상설전 '한국 현대미술 하이라이트' 첫머리에 걸린 김환기의 '산울림'과 이성자의 '천년의 고가'(오른쪽). 연합뉴스
1951년 이혼한 33살 이성자는 어린 세 아들을 두고 프랑스로 건너갔다. 아카데미 그랑 쇼미에르에서 그림을 처음 배웠고, 3년 뒤 국립미술전에 작품을 출품했다. 당시 파리 굴지의 화랑인 샤르팡티에 갤러리에서 개인전도 열었다. 1200점 넘는 회화ㆍ판화ㆍ공예를 남겼다. 대표작 ‘천년의 고가’(1961)는 이건희컬렉션으로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소장품 상설전인 ‘한국 현대미술 하이라이트’ 맨 첫머리에 걸려 있다.

만년의 이성자.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1993년 완공된 ‘은하수’의 기본설계는 이성자가, 세부 설계와 시공은 지역 건축가 크리스토프 프티콜로가 맡았다. 826㎡(약 250평) 규모 복합 공간이다. 흰 원통을 정확히 반으로 쪼갠 듯한 반원형 입체가 요철(凹凸) 모양의 면으로 마주 보고 있는 독특한 구조다. 이성자는 이 건물을 음양의 조화에 맞게 설계ㆍ운영했다. 빛이 넉넉히 들어오도록 창을 설계한 ‘양’의 건물에서는 낮에 그림을 그리고, ‘음’의 건물에서는 저녁에 판화 작업을 했다. 두 건물 사이에는 ‘은하수’를 상징하는 인공 시내가 흐른다. 실내엔 한국식 창호와 자개장 등 전통 가구를 배치했다. 이성자는 이 건물에 대해 “내 작업을 평면에서 입체로 옮긴 것”이라고 했다.
프랑스 관광청은 이곳을 새로운 ‘문화유산 루트’의 거점에 포함할 계획이다. 생전에 이성자는 “나는 슬프지 않다. 내가 서 있는 곳 발끝에 내 고향이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