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출 30억인데 전기료 5억"…반월공단 공장 10곳 문닫았다

현대제철은 지난 1월, 미국 루이지애나주에 연간 270만t 규모의 전기로 제철소를 짓기로 했다. 현지 고객이 많은 데다, 낮은 전기요금 등 제조업 환경이 매력적이어서다. 20일 미국 에너지청(EIA)과 한국전력 등에 따르면 루이지애나의 산업용 전기요금은 ㎿h당 51.1달러(약 7만7260원)로, 최근 산업용 전기료가 급격하게 오른 한국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대기업처럼 해외로 이전하기 어려운 중소기업은 급등한 전기료에 속수무책이다. 전기로 도금을 하는 표면처리업기업 삼일금속 관계자는 “전기료 비중이 원가의 20%도 넘는다. 최근 2년 동안 반월산업단지 35개 표면처리업체 중 10개가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고 전했다. 

김영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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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용 전기요금의 가파른 인상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오랜 기간 ㎿h당 10만원 이하의 저렴한 산업용 전기요금 덕분에 한국은 제조업 하기 좋은 나라로 통했다. 하지만 2022년부터 2024년까지 불과 2년 사이 산업용 전기요금(을·300㎾ 이상 사용자)이 70%가량 인상되며 상황이 달라졌다.

김영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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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기간 가정용 전기요금은 약 30% 인상에 그쳤다. 과거 한국은 기업의 경제적 역할을 고려해 산업용 전기요금을 주택용보다 낮게 책정해왔지만, 2023년부터는 산업용이 가정용을 앞지른 상황이다. 

배경에는 이른바 ‘전기요금 포퓰리즘’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론 악화를 우려해 가정용·농업용 요금은 소폭 인상에 그친 반면, 산업용은 2022년 이후 7차례나 인상했다. 2024년 12월 기준 산업용 전기는 평균 ㎿h당 17만3260원, 주택용은 15만2390원, 농업용은 ㎿h당 7만7330원이다. 한 제조업체 관계자는 “산업용인지 정치용 전기요금인지 모르겠다”며 “한전이 여전히 적자인 만큼 추가 인상이 불가피할 텐데, 그 부담이 또 산업계에만 전가될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한전은 “한국의 전기요금이 OECD 평균과 비교해 여전히 높은 수준은 아니다”라고 해명한다. 이에 대해 최규정 대한상의 그린에너지지원센터장은 "제조업 중심인 한국의 산업용 전기료를 OECD와 단순 비교해 싸다고 말할 수 없다"며 "과거 일본 제조업들이 자국 전기료가 비싸 한국에 왔었는데, 이제 한국과 비슷한 제조업 기분 주요 경쟁국과 비교했을 때 전혀 경쟁력이 없다"고 지적했다. 대한상의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 한국의 산업용 전기요금(㎾당 190.4원)은 미국(121.5원)과 중국(129.4원)보다 높고, 프랑스(197.1원)와 비슷한 수준에 이르렀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SK어드벤스드와 LG화학은 전기료를 아끼기 위해 ‘전력 직접 구매’에 나서고 있다. 이는 일정 규모 이상(3만㎸A 이상) 전기를 사용하는 기업이 한국전력을 거치지 않고, 도매시장(전력거래소)에서 전기를 직접 사는 방식이다. 2003년에 도입됐지만 그동안은 한전의 산업용 전기요금이 워낙 저렴해 활용하는 기업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전기료 부담이 커지면서, 기업들이 20년 넘게 잠자고 있던 이 제도를 다시 꺼내 들고 있는 것이다.

공기업인 코레일조차 전기 직접 구매 의사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코레일은 전기요금으로 5796억원(영업비용의 약 9%)을 지출했는데, 올해는 전기료 인상으로 이보다 10% 이상 더 들 것으로 전망되자 대응에 나선 것이다. 한전에 따르면 수전설비 용량이 3만kVA 미만인 사용자들도 증설을 통한 직접구매 가능성을 문의하는 등 '탈(脫)한전' 움직임이 포착됐다.

중소기업은 뾰족한 대책이 없다. 특히 에너지 소비가 많은 주물·금형 같은 뿌리 산업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 주물업체 비엠금속을 60년간 경영해온 서병문 한국주물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은 "60년 가까이 주물업계에 몸담아왔지만, 전기요금 때문에 지금처럼 힘든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매달 30억원 매출 중 전기료가 5억원 이상 나간다"며 "6월부터 계절용(여름) 전기료까지 적용되면 적자"라고 설명했다. 주요 주물업체는 지난 16일 긴급이사회를 열었는데, 최악의 경우 공장 가동중단까지 대안으로 검토됐다. 

무엇보다 인상 속도가 가파르다. 우지훈 한국표면처리기능장회 회장은 "요금 체계까지 고려하면 ㎾h당 100원을 내다가 210원으로 올랐다. 현장에서는 110% 정도 오른 걸로 체감된다"며 "전기료만큼 납품가격을 바로 올릴 수도 없고, 문을 닫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전기료 인상이 기업의 비용 부담을 넘어, 장기적으로 국가 제조업 경쟁력을 약화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최준영 법무법인 율촌 수석전문위원은 “제조업이 경쟁력을 갖추려면 자원이 풍부하거나 인건비가 저렴하거나 인프라가 잘 갖춰져야 한다”며 “전기료마저 급등하면서 한국은 제조업에서 강점을 찾기 어려운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값싼 전기료를 찾아 한국전력을 떠나는 기업이 많아지면 한국의 전력 시스템 전반이 흔들릴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전력은 ‘규모의 경제’를 통해 저렴하고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가능한 구조인데, 주요 수요처였던 대기업들이 이탈할 경우 국가 전력 시스템 전반의 안정성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첨단산업 중심으로 국내 산업용 전력 수요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전문가는 차기 정부에서 에너지 판매 체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유승훈 서울과기대 미래에너지융합학과 교수는 “전기 직거래가 가능한 분산에너지 특구 지정을 확대해서 전력 거래 비용을 낮춰주는 방안이 합리적”이라고 했다. 정부가 지방자치단체를 분산에너지 특구로 지정하면 해당 지역 사업자는 한전에서 전기를 사는 구조에서 벗어나 직거래 등을 할 수 있어 가격이 20~30% 낮아지는 효과가 있다.

요금제를 개편하는 방안도 제기되고 있다. 조홍종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현재 산업용ㆍ농사용ㆍ주택용 등 용도별로만 구분된 요금제를 전력 수요자의 지역ㆍ전압별로 더 세분화하면 저렴한 요금제를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전기료 원가는 사용 전압이 높을수록 저렴해지는데, 220V를 쓰는 주택용보다 고압 전류를 쓰는 산업용의 낮은 원가를 반영한 요금제 등을 검토해야 한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