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한 지하 방공호에서 연습 중인 우크라이나 연극인들. 왼쪽부터 올레나 이반첸코, 올렉시, 나스땨, 빅토리아. 박현준 기자
공습경보만 울리면 본능이 곤두선다. 하필 준비한 기사가 ‘전쟁 속을 살아가는 예술인들’이었다. 극한 상황 속에서도 도시가 아귀 지옥으로 전락하지 않는 이유를 캐고 싶어서였다. 문명의 위력을 알고 싶었다. 공교롭게도 준비된 기사의 첫 장면은 방공호에서 상연되는 연극이었다.
#1. 재생
“조심히 내려와요.” 불 꺼진 계단을 내려가자 발걸음 소리가 동굴에 들어온 듯 귀에 울렸다. 곰팡내가 벽을 타고 피어 올라왔다. 한 층 정도를 내려가자 초등학교 교실 두 개를 이어 붙인 규모의 널찍한 공간이 나타났다. 페인트칠 된 벽, 낡은 의자, 흐릿하게 빛나는 형광등. 영락없는 방공호다. 지난 20일 찾은 키이우의 이 지하 방공호에선 배우들이 연습에 여념 없었다. 감독·극작가 겸 배우인 올레나 이반첸코(45)가 활짝 웃으며 맞았다. “우리 극단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지하 방공호에 있는 극단에서 연습 중인 우크라이나 연극단원. 박현준 기자
“하느님, 들리세요?/전쟁은 필요 없어요./저는 뻐꾸기 소리를 듣고 싶어요./엄마가 자장가를 불러주고, 아빠는 전쟁에서 돌아오길 바라요./이 고운 말, 우크라이나어를 너무 사랑해요./우리 마을과 교회, 황금빛 밀밭도요./그러나 요즘은 자꾸 울게 돼요.”
올레나에게 연극은 우크라이나인들이 다시 태어날 힘을 주는 수단이다. BTS 팬이라는 올레나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한국인들이 ‘한(恨)’이란 걸 느꼈던 것처럼 우크라이나인들도 그렇다”며 “한국인들이 ‘재생’에 성공한 것처럼, 우리도 그러기를 바란다”고 했다. 공연장은 러시아의 공습경보가 울리면 사람들이 대피하러 오는 실제 방공호다.
그렇다고 마냥 심각한 연극만 올리지는 않는다. 배우 올렉시는 “참전 중인 단원들이 너무 심각한 것 말고 코미디를 찍어서 보내달라고 한다”며 “그러면 유머를 담은 연극을 제작해 전선에 보낸다”고 했다.
#2. 수수께끼

막심 기예라시모프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완성했던 그림을 들어보이고 있다. 박현준 기자
막심은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림은 폭력에 불과하다”며 “반면에 대가들은 그림에 수수께끼를 숨길 줄 알았다”고 강조했다. 삶에는 비밀이 있어야 하고, 그게 문명이라는 게 그의 지론인 듯했다.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던 중 막심은 다시 붓을 들었다. 처음으로 완성한 그림은 우크라이나의 어느 집 마당에서나 흔히 보는 노란 금잔화를 큼지막하게 그린 것이다. 우크라이나에선 고향과 어머니를 상징한다. “화폭에 작은 꽃을 커다랗게 담아 세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점을, 그리고 우크라이나인들의 마음은 관대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3. 기억

도예가 나탈리 안티피나와 작품들. 오른쪽의 상자를 뒤집어쓴 사람이 전쟁 이전의 작품. 박현준 기자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나탈리의 작풍은 바뀌었다. 박현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