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간 토트넘에 청춘을 바친 손흥민 "전 레전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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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린 기자 사진 박린 기자
겸손의 끝판왕이라 불린 손흥민은 유로파리그 우승 후 오늘만큼은 토트넘 레전드라고 소감을 밝혔다. [로이터=연합뉴스]

겸손의 끝판왕이라 불린 손흥민은 유로파리그 우승 후 오늘만큼은 토트넘 레전드라고 소감을 밝혔다. [로이터=연합뉴스]

 
“네. 레전드라고 하죠. 안될 게 뭐가 있겠어요. 오늘만큼은요.”  

22일(한국시간) 스페인 빌바오의 산 마메스 경기장. 허리춤에 태극기를 두른 잉글랜드 프로축구 토트넘 홋스퍼 손흥민(33)이 ‘이제 당신은 레전드인가요’란 TNT스포츠 진행자의 질문에 격양 된 목소리로 답했다. 한국 축구에서 ‘차범근·박지성을 1·2등, 자신을 3등’으로 꼽으며 한껏 낮추던 평소 모습과 달랐다. 손흥민은 “(토트넘에서) 17년간 누구도 (우승을) 해내지 못했다. 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도 했다.  

손흥민은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데 누가 밀어서 박았다”며 이마에 난 상처를 보여주면서도 웃었다. 라커룸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깨방정’을 떨며 15㎏ 달하는 우승 트로피를 들까말까하다가 다섯 번 만에 번쩍 들어 올렸다. “축하파티를 하다가 내일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는데 (일요일 프리미어리그 브라이튼전) 취소는 어떤가”라는 농담도 했다.

손흥민이 트로피에 부딪혀 이마에 생긴 영광의 상처를 보여주고 있다. [사진 토트넘 인스타그램 캡처]

손흥민이 트로피에 부딪혀 이마에 생긴 영광의 상처를 보여주고 있다. [사진 토트넘 인스타그램 캡처]

 
손흥민이 이렇게까지 신나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프로 데뷔 후 15년 만에 첫 우승으로 ‘무관의 한’을 풀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토트넘은 이날 2024~25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유로파리그 결승전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잉글랜드)를 1-0으로 꺾었다. 전반 42분 파페 사르가 왼쪽에서 올린 크로스를 문전 쇄도한 브레넌 존슨(23·웨일스)이 발로 건드렸고, 맨유 수비수 루크 쇼 몸에 맞고 굴절되면서 골로 연결했다.  


예상과 달리 선발 명단에서 제외된 손흥민은 후반 22분 주장 완장을 건네받고 왼쪽 윙포워드로 교체 투입됐다. 손흥민은 드리블 돌파와 프리킥으로 역습을 이끌었고 수비에도 적극 가담했다. 종료 휘슬이 울리자 손흥민은 팀 동료 제임스 매디슨과 부둥켜 안고 흐느꼈다. 손흥민의 서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감동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다.

손흥민은 18살이던 2010년 함부르크(독일) 시절 유로파리그 공인구를 품에 안고 잤다. 레버쿠젠(독일)을 거쳐 스물세살이던 2015년 토트넘으로 이적해 프리미어리그(EPL) 득점왕과 푸슈카시상 등을 숱한 개인상을 수상했다. 10년간 자신이 사랑하는 토트넘에서 450경기 이상을 뛰며 청춘을 바쳤지만, 우승과는 인연은 없었다. 2016~17시즌 EPL, 2018~19시즌 유럽 챔피언스리그, 2020~21시즌 리그컵 모두 준우승에 그쳐 아쉬움의 눈물을 쏟았다. 

토트넘 팬인 영화 스파이더맨 주인공 톰 홀랜드는 지난 2023년 “토트넘은 우승한 적이 없어 응원하기 정말 어렵다. 손흥민과 해리 케인은 레알 마드리드(스페인)로 가라고 말하고 싶다”고 추천할 정도였다. 지난 시즌 바이에른 뮌헨(독일)으로 떠난 케인은 올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해 무관에서 벗어났다. 6년 전 리버풀과의 유럽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나선 토트넘 선발 11명 중 지금까지 남은 유일한 선수는 손흥민 뿐. 못 떠난 게 아니라 안 떠난 손흥민은 마지막 우승이 2008년 리그컵이었던 토트넘에 17년 만에 우승컵을 안겼다. 

BBC 스포츠가 인스타그램에 태극기가 펄럭이는 배경으로 손흥민이 우승트로피에 입을 맞추는 사진을 올렸다. [사진 BBC 스포츠 SNS]

BBC 스포츠가 인스타그램에 태극기가 펄럭이는 배경으로 손흥민이 우승트로피에 입을 맞추는 사진을 올렸다. [사진 BBC 스포츠 SNS]

 
스포츠매체 디애슬레틱은 “손흥민은 이제 케인을 넘어 토트넘 현대사의 최고의 선수로 남을 수도 있다. 케인은 트로피를 위해 토트넘을 떠났지만, 손흥민은 의심하는 자들이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 남았다”고 낭만을 전했다. 영국 BBC는 태극기가 펄럭이는 배경으로 손흥민이 우승컵에 입을 맞추는 사진을 올렸고, 토트넘은 ‘유럽 메이저 대회 우승을 이끈 최초의 한국인 주장”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아버지 손웅정씨 품에 안긴 손흥민. [로이터=연합뉴스]

아버지 손웅정씨 품에 안긴 손흥민. [로이터=연합뉴스]

 
최근 ‘임신 협박’ 사생활 논란으로 마음 고생이 심했던 손흥민은 경기 후 아버지 손웅정씨 품에 안겼다. 손흥민은 중계사와 인터뷰에서 울먹거리며 “한국인으로 태어나 자랑스럽고, 완벽한 퍼즐을 맞추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해주신 팬 분들에게 감사드린다”며 “저를 좋아해주는 분들께 (우승까지) 너무 오래 걸려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고, 저를 싫어하는 분들도 이걸(우승)로 인해 절 조금이라도 좋아해주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태극기를 허리춤에 두르고 유로파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손흥민. [사진 유로파리그 SNS]

태극기를 허리춤에 두르고 유로파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손흥민. [사진 유로파리그 SNS]

 
손흥민은 토트넘에서 10년간 그토록 찾아 헤맨 ‘우승’이라는 커리어 ‘마지막 퍼즐’을 맞췄다. 다만 토트넘과 10년 동행을 계속 이어갈지는 미지수다. 결승전에 손흥민 대신 선발 출전한 존슨은 결승골을 만들어냈고, 히샬리송(브라질)은 미친 듯이 뛰어 다녔다. 손흥민은 올 시즌 11골-12도움을 올렸지만 시즌 막판 발 부상으로 한 달 간 결장하는 등 팀 내 존재감이 예전만 못했다. 

손흥민은 토트넘과 1년 연장 계약만 해서 내년 6월이면 계약이 끝난다. 사우디아라비아 프로축구가 손흥민을 원한다는 보도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토트넘은 올여름이 33세 손흥민의 이적료를 챙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유로파리그 우승을 이끌었지만 EPL 17위에 그친 엔제 포스테코글루 토트넘 감독의 해임설이 나오는 가운데, 차기 사령탑에 따라 손흥민의 거취가 결정될 수도 있다. 토트넘이 다음 시즌 유럽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따낸 만큼, 손흥민이 잔류해 ‘토트넘 레전드’로서 계속해서 발자취를 남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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