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L 17위 토트넘의 유로파 우승 뒤엔 명장과 특급 도우미 있었다

주장 손흥민(오른쪽)에게 전술 지시하는 포스테코글루 감독. 토트넘 우승의 또 다른 주역이다. AP=연합뉴스

주장 손흥민(오른쪽)에게 전술 지시하는 포스테코글루 감독. 토트넘 우승의 또 다른 주역이다. AP=연합뉴스

'역사적 승리.' 

영국 BBC는 구단 역사상 가장 부진한 시즌을 보낸 토트넘(잉글랜드)이 2024~25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유러파리그 정상에 오른 것을 두고 이렇게 표현했다. 토트넘은 22일(한국시간) 스페인 빌바오의 산 마메스 경기장에서 열린 대회 결승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1-0으로 물리쳤다. 이로써 2007~08시즌 리그컵 우승 이후 17년간 이어진 '무관의 한'을 풀었다. 유러파리그는 챔피언스리그와 더불어 양대 유럽클럽대항전으로 불리는 대회다.  

부진한 시즌을 보낸 끝에 일군 우승이라서 더 극적이다. 올 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에서 토트넘은 강등권(18~20위)을 가까스로 면한 17위에 그쳤다. 잉글랜드축구협회(FA)컵, 리그컵 등 각종 대회에서 일찌감치 탈락했다. 유로파리그가 우승에 도전할 수 있는 유일한 대회였다. 토트넘은 유로파리그 우승 팀에 주어지는 다음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본선 직행 티켓까지 거머쥐었다.  

공중에 날아올라 맨유의 슈팅을 걷어낸 수비수 판더펜(맨 위). 로이터=연합뉴스

공중에 날아올라 맨유의 슈팅을 걷어낸 수비수 판더펜(맨 위). 로이터=연합뉴스

'캡틴' 손흥민(33)과 함께 토트넘의 반전 드라마를 합작한 건 '우승 제조기' 안지 포스테코글루(60·호주) 감독이다. 불과 전날까지 '광대'라고 조롱받던 그는 우승으로 지도력을 입증해 단숨에 '영웅'이 됐다. 그는 우승 기자회견에서 "이건 의심할 여지 없이 나에게 가장 어려웠던 업적"이라며 감격했다. 그리스 이민자 출신 포스테코글루 감독은 호주의 브리즈번 로어, 맬버른 빅토리, 호주 대표팀, 일본 요코하마 마리노스 등을 지휘하다 스코틀랜드 명문 셀틱 사령탑을 거쳐 지난 시즌 토트넘 사령탑에 부임했다. 그는 호주 A리그와 일본 J리그 우승을, 셀틱에선 2022~23시즌 3관왕을 달성하는 등 성공 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축구 변방에서만 지도자 생활한 포스테코글루는 빅리그 EPL에선 고전했다. 부임 첫 시즌인 2024~25시즌 리그 5위를 차지했지만, 2년 차인 올 시즌 상대 팀에 전술이 간파돼 부진을 거듭하며 추락했다. 부상 악재도 겹쳤다. 토트넘은 제임스 매디슨(29), 데얀 쿨루셉스키(25), 라두 드라구신(23), 루카스 베리발(19) 등 주축 선수들이 시즌 내내 부상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팬과 언론에선 감독의 경질 여론이 일었다. 이번 결승전을 앞두고 영국 이브닝스탠더드가 포스테코글루 감독이 처한 상황을 두고 '영웅과 광대 사이를 오가고 있다'고 비꼬았다.  


그라운드 안팎에서 헌신하며 주장 손흥민을 보좌한 로메로(위). AFP=연합뉴스

그라운드 안팎에서 헌신하며 주장 손흥민을 보좌한 로메로(위). AFP=연합뉴스

하지만 그에겐 '계획'이 있었다. 포스테코글루는 "올해 1월 말, 이적 시장이 마감됐을 때, 난 바로 그 순간 (리그를 포기하고) 유로파리그에 집중해 우승을 노리기로 결정했다. (도박이라고 생각한) 구단 관계자 다수가 반대했지만, 난 우승할 수 있다고 믿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토트넘은 늘 세계 최고 수준의 감독과 선수들이 몸담았지만, 한 번도 우승을 경험하지 못했다. 이 구단엔, 단순히 우승 경험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고 털어놨다.  

이후 포스테코글루는 손흥민을 중심을 팀을 하나로 뭉치게 했다. 리그 부진에 흔들리지 않고 '유럽 정상'이란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설득하고 선수단을 운영했다. 시즌 막판 부상에서 회복한 손흥민에게 휴식을 주고 출전 시간을 줄인 것도 유로파리그 결승을 대비하는 과정이었다. 포스테코글루는 "유로파리그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했다. 리그에서 대가를 치렀고, 그 책임은 내가 졌다"고 털어놨다. 

부상에도 결승전에 동행해 응원을 보낸 또 다른 부주장 매디슨. 로이터=연합뉴스

부상에도 결승전에 동행해 응원을 보낸 또 다른 부주장 매디슨. 로이터=연합뉴스

포스테코글루는 '부임 2년 차 우승 징크스'도 이어갔다. 그는 "호주대표팀·요코하마·셀틱에 이어 토트넘까지 2년 차에 우승했다.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내가 팀에 심은 신념의 결과물"이라고 큰소리쳤다. 그는 이어 "난 늘 승자였다. 지도자 인생 내내 승자였다. 내 성취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잘 안다. 빅리그에서 이룬 성과가 아니라는 점 때문일 거다. 하지만, 난 우승만 해왔다"고 강조했다.  

수비수 마키 판더펜(24)과 골키퍼 굴리엘모 비카리오(29)는 득점 만큼이나 값진 수비로 토트넘의 우승을 도운 조연이다. 비카리오는 이날 맨유가 시도한 15차례 슈팅을 무실점으로 막아내는 선방쇼를 펼쳤다. 판더펜은 후반 23분 맨유 라스무스 호일룬의 헤딩이 골라인을 넘기 직전 공중에 몸을 던지는 바이시클킥으로 가까스로 걷어냈다. 

'수비의 핵' 판더팬 역시 올 시즌 부상 여파로 많은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하지만 승부처에서 결정적인 수비에 성공하며 가치를 증명했다. 부주장인 크리스티안 로메로(27)와 매디슨은 손흥민을 보좌해 팀을 이끌었다. 로메로는 이날 손흥민이 후반 교체로 그라운드를 밟을 때까지 주장 완장을 차고 팀을 이끌었고, 매디슨은 부상 중에도 결승에 동행해 응원하는 책임감을 보였다. 토트넘 구단 홈페이지는 "함께 이룬 영광"이라고 자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