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대법원에서 위작으로 최종 결론내려진 작품 '아이들'. 검찰의 과학감정, 전문가 안목감정, 자료감정 결과 외에도 고(故) 이중섭 화백은 아이들을 그릴 시 머리카락을 그리지 않는 점, 선(線)이 얇지 않다는 점 등을 토대로 위작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사진 중앙일보DB
지난 3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판매되던 고(故) 이중섭 화백 굿즈(기념품) 중 일부가 진품이 아닌 ‘위작’이 모티브였던 것으로 파악됐다. 유족의 문제 제기에 미술관은 제품 출시 4년 만에 판매를 중단했고, 굿즈 제작자에 대한 형사고발도 이뤄졌다.
8일 경찰 등에 따르면 경기 성남수정경찰서는 굿즈 제작사 A사의 대표 유모씨에 대한 사기 혐의 고발 사건을 지난달부터 수사하고 있다. 경찰은 이 화백 유족으로부터 고발장을 접수해 수사에 착수했다. 유족은 유씨가 2005년 이 화백의 작품이라며 공개된 ‘아이들’ 그림이 위작임을 알고도 굿즈로 만들어서 판매했다고 주장했다.
‘아이들’은 2007년부터 10년간 이어진 법정 다툼 끝에 1·2심과 대법원에서 모두 위작이라고 결론이 난 그림이다. 수사기관은 과학 감정과 전문가의 안목 감정, 자료 감정 등을 통해 해당 작품에 이 화백 지문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고, 서명이 미리 그려진 연필 밑그림 위에 덧그려졌으며 필법도 진품의 서명과 다른 점 등이 있다고 지적했다. 감정 과정에서 전문가는 수사기관에 “이중섭 화백은 필력(글씨의 획에 드러난 힘)이 좋은 작가로 널리 알려졌는데 이 사건 그림은 운필(붓 움직임)의 기본이 안 돼 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법원은 이런 점 등을 토대로 해당 작품을 위작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2020년 10월부터 지난 3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점, 서울점(종로구 안국동 소재)에서 판매되던 '아이들' 뱃지(가운데). 2007년부터 10년 간 법정 다툼 끝에 대법원에서 최종 위작으로 판결된 '아이들'을 모티브로 제작됐다. 사진 고(故) 이중섭 화백의 조카 손녀 이지연씨
유족은 유씨 업체가 ‘아이들’의 위작 논란을 알면서도 굿즈에 이 화백의 실제 서명을 기재하고, 포장지에는 100자가 넘는 이 화백 관련 설명을 수록한 점 등을 들며 소비자를 속이려 한 사기죄의 ‘미필적 고의’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행동이 사기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알면서도 저질렀다는 취지다.
이와 관련해 A사 대표 유씨는 중앙일보와 주고받은 메일에서 ‘아이들’의 위작 논란을 2022년 7월께 알았다고 설명했다. 굿즈 제작에 참고가 되도록 ‘아이들’의 이미지를 보내 줬던 지인에게 출처를 문의해 보니 “자료집이 있다”는 답변을 들어 위작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았다고도 주장했다. 유씨는 “위작이었다면 애초에 자료집에 포함되지 않았을 테고, 이후에라도 문제가 됐을 것”이라며 “(위작일 것이라) 의심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해당 제품은 2020년 10월 판매가 시작됐다. 국립현대미술관 상품기획팀은 당시 ‘아이들’을 위작으로 판단한 법원 판결을 몰랐던 것으로 파악됐다. 이 화백 유족은 2023년 9월께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점에 방문해 해당 제품을 발견하고, 현장 직원에게 항의했다. 그러나 직원이 이런 상황에 대한 보고를 누락하면서 제품 판매는 중지되지 않았다고 한다.
올해 초 유족은 서울 종로구 소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점에 방문해 해당 제품이 포장지 등이 바뀐 채 여전히 판매되는 점을 확인해 재차 문제를 제기했다. 이번에는 유족 측 항의가 미술관 운영 재단에 전달되면서 제품 판매는 일괄 중단됐다. 해당 제품은 덕수궁점과 서울점, 청주점에서 4년가량 506만 원어치(약 400여개)가 팔렸다고 한다.

'아이들' 뱃지의 뒷면. 고(故) 이중섭 화백에 관한 설명이 100자 넘게 적혀 있다. 이 화백의 유족은 이런 점 등을 토대로 해당 뱃지의 제작자가 소비자를 적극적으로 속이려 해 사기죄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고(故) 이중섭 화백의 조카 손녀 이지연씨
논란에 대해 국립현대미술관 측 관계자는 “‘아이들’ 관련 제품뿐만 아니라 A업체의 제품 10종의 판매를 모두 중단했다”며 “납품업체 선정 매뉴얼을 보강하고, 선정 심의 절차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유족 측은 제품 판매가 중단됐지만 유씨를 고발한 이유에 대해 “이 화백이 사망한 후 수십년이 흘렀음에도 위작 논란이 끊이지 않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며 “위작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진품에 담긴 이 화백만의 실력과 솜씨는 갈수록 평가절하될 것이고, 이는 한국 미술계에도 큰 손해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뮤지엄에선 이 화백 작품으로 여겨졌던 ‘기어오르는 아이들’이 위작으로 판명돼 전시가 중단되는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