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활동 했다고 퇴출? 힘빠진 대학 내 소수자 인권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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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율 기자 사진 전율 기자
경희대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학소위) '울림'이 지난달 12일 정경대에 부착한 대자보. 지난달 9일 게시한 대자보를 두고 갈등이 불거지자 학소위는 "공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며 "공론장에서의 대화를 제안한다"고 붙였다. 학소위 인스타그램 캡쳐

경희대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학소위) '울림'이 지난달 12일 정경대에 부착한 대자보. 지난달 9일 게시한 대자보를 두고 갈등이 불거지자 학소위는 "공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며 "공론장에서의 대화를 제안한다"고 붙였다. 학소위 인스타그램 캡쳐

 
최근 대학가에서 소수를 대변하는 자치 기구가 설 자리를 잃고 있다. 과거와 달리 학생들의 사회 현상에 대한 관심이 줄고 정치 성향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를 두고 동아리가 설립 목적을 벗어나 정치색을 띠면 안 된다는 의견과 함께 학내 자치기구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경희대 중앙운영위원회는 9일 오후 7시 임시 확대 운영위원회를 열고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학소위) ‘울림’의 존폐를 논의했다. 최종 의결은 이달 25일 정기 확대 운영위원회에서 열린다. 해당 논란은 지난달 9일 경희대 정경대 학생회가 추진한 이준석 당시 대통령 선거 후보 초청 강연을 두고 학소위가 ‘이준석이 연단에 설 자격이 있는가’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게시하며 시작됐다. 학소위는 “정경대 학생의 정치 참여 제고와 차기 정치 지도자와의 소통의 장 마련이라는 취지에 적합한 인사가 맞느냐”며 “소수 혐오를 정치 자산으로 삼는 인물”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정경대 학생회장 신하균(21)씨는 “학소위가 학내 소수자 권리 증진이라는 동아리 목적에 어긋나게 정치 활동을 하고 있다”며 “학소위 존폐를 논하고 필요하다면 대안 기구 설립도 논의하자”고 했다. 또 “인권 문제를 정치와 분리할 수 없다는 얘기도 있지만, 반대로 인권을 꼭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건 아니다”는 입장을 내놨다.

지난달 9일 경희대 정경대 학생회가 초청한 개혁신당 이준석 전 대선 후보 강연 포스터. 사진 경희대 정경대 학생회 제공

지난달 9일 경희대 정경대 학생회가 초청한 개혁신당 이준석 전 대선 후보 강연 포스터. 사진 경희대 정경대 학생회 제공

 
학소위 위원장 이가현(22)씨는 “인권기구에 대한 탄압과 과도한 잣대로 여겨진다”며 “현 상황은 대자보 사태에 대한 보복으로밖에 보이지 않고, 학생 자치의 민주적인 운영을 방해하는 조치”라고 반박하고 나섰다. 학소위를 지키자는 성명엔 6일 오후 1시 30분 기준 약 1400명이 참여했다. 지지하는 학생들은 “권리 하나를 없애는 건 쉽지만 없는 것을 새로 만드는 것은 매우 힘들다. 지금 사라지면 다시 생길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등 의견을 남겼다.

 
비슷한 일은 다른 대학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지난달 7일 고려대에서는 여학생위원회(여위)와 소수자인권위원회(소인위)에 대한 징계로 두 위원회의 신설 합병 안이 가결됐다. 다른 기구에 비해 활동이 부진해 각자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게 주요 이유였다. 또 징계 결정 과정에서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여위와 소인위는 “윤석열 전 대통령 구속에 반발해 일어났던 서울서부지법 난동 사태 이후 민주주의 관련 세미나를 열고, 진보 성향의 청년학생단체가 주최한 노동절 전야제 등에 참여했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정치·사회 이슈에 목소리를 낸 것이 문제 됐을 것이란 주장이었다. 고려대 총학생회장 이정원(23)씨는 “징계는 학내 기준에 따라 자동 회부된 것이고 다른 기구에 비해 활동 등이 부족했다”고 설명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한때 학생 운동은 가장 영향력이 큰 사회 운동 중 하나였으나, 1997년 외환위기 이후로 취업 등 새로운 고민이 생기면서 학생 운동이 위축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며 “특히 최근 들어서는 젠더 등 민감한 이슈에 대한 정치적 입장 차이가 벌어지면서 학내에서 사회·정치 관련 목소리 내기 더 어려워졌다”고 분석했다. 

고려대학교 학내인권단체협의회 학생들이 지난 13일 오전 서울 성북구 고려대 서울캠퍼스 중앙광장에서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의 인권 자치 기구 탄압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뉴스1

고려대학교 학내인권단체협의회 학생들이 지난 13일 오전 서울 성북구 고려대 서울캠퍼스 중앙광장에서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의 인권 자치 기구 탄압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뉴스1

 
이같은 흐름에 대한 재학생들 사이의 의견은 분분하다. 일부 재학생들은 탈정치 흐름이 사회 참여를 제한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경희대에 재학 중인 김모(22)씨는 “누군가는 정치적 목소리를 내야 사회가 발전한다고 생각한다”며 “에브리타임에서 유독 ‘나와 다른 의견’에 대한 혐오가 심한데 정치적 목소리를 냄으로써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는 대학 내 민주주의가 유지돼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단체나 동아리의 원래 목적을 잃어선 안 된다는 비판도 있다. 서울대에 재학 중인 박모(24)씨는 “교내 인권 위원회는 정치 활동이 아닌 학생 인권을 목적으로 세워진 곳인데 심지어 특정 정당 소속처럼 보일 때가 있다”며 “모두를 위한 위원회로 활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항섭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는 학내 탈정치화 흐름을 두고 “현재 한국의 정치 구도가 토론의 장 대신 상대 진영을 혐오하도록 만든 결과 청년 세대들이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것을 꺼려하게 된 것”이라며 “서로 다른 의견과 소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