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한남동 페이스갤러리 전시장 3층 공간을 막아 어두운 복도를 만들고 그 끝에 '웨지워크' 단 한 점을 전시했다. 가장자리(Wedge)에 색색의 빛 사각형을 만들어 보색 대비로 공간감을 창출하는 작품이다. 사진 페이스갤러리
갤러리 3층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암전. 어둠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복도를 더듬어 지나가자 벽면을 가득 채운 세 개의 직사각형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자리에 노랗고 파랗고 분홍인 조명이 사각형을 그리며 공간에 깊이를 창출한다. 조명은 빨강과 파랑, 녹색과 빨강, 보라와 노랑ㆍ녹색 등 시시각각 바뀐다. 변하는 건 조명 뿐 아니라 보색 대비에 반응해 잔상을 남기는 내 눈, 망막이 완성하는 작품이다. 서울 한남동 페이스갤러리에서 설치된 ‘웨지워크(Wedgework)’다. 물감도 붓질도, 초점도 스토리도 없이 조용히 집중하게 하고 마음을 가라앉힌다.

제임스 터렐은 11일 서울 페이스갤러리에서 여는 개인전 '더 리턴'에서 “팝부터 클래식까지, 한국은 문화의 경계를 확장해 나가는 아시아의 강력한 중심”이라고 인사했다. 연합뉴스
‘빛의 마술사’ 제임스 터렐(82)이 돌아왔다. 2008년 토탈미술관ㆍ쉼박물관 등 세 곳에서 연 전시 후 서울서 17년 만이다. 페이스갤러리 전관에서 14일 개막하는 ‘귀환(The Return)’이다. 모서리에 색색의 빛을 투사해 빛의 벽을 중첩하는 ‘웨지워크’, 일상 공간에서 빛을 체험하게 하는 LED 작업 ‘글래스워크(Glassworks)’ 등 5점의 설치, 판화와 홀로그램 작업, 그리고 미국 애리조나의 사화산에서 50년 가까이 진행 중인 ‘로든 분화구’와 관련된 사진 등 25점이 나왔다.

전시장 2층의 '글래스워크'(2021). 과거 대형 설치 작업으로 구현한 감각적 빛의 경험을 LED 기술을 기반으로 일상적 건축 환경으로 확장했다. 연합뉴스
11일 전시장에서 만난 터렐은 "사람들은 흔히 빛을 통해 다른 걸 드러내고자 하지만, 나는 빛 그 자체를 드러내는 데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퀘이커 교도인 그는 인간은 누구나 내면의 빛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네 안의 빛을 찾으라"는 할머니 말씀을 지금껏 실천하고 있다. "1967년 첫 프로젝션 도구를 만든 이래 이제는 발광다이오드(LED)나 컴퓨터로 잘 제어할 수 있게 됐다. 이런 기술이 나오기까지 오래 살게 돼 무척 다행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파랑과 노랑을 섞으면 녹색이 되지만, 파란빛과 노란빛을 섞으면 흰빛이 나온다. 소리라면 음역을 정확히 인식하는 절대음감의 사람들이 있겠지만, 색상은 어떤 맥락에 있는 지가 중요하다"며 “화이트아웃 상태의 조종사처럼, 지평선이 사라진 세계에서 방향 감각은 상실되지만, 오히려 새로운 감각의 지평을 열 수 있다. 인터넷 공간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가까이 들여다 보면 가장자리에 홈이 파여 있고 거기서 나오는 색 조명이 망막에 반응하며 빨려들어갈 듯 착시를 일으킨다. 연합뉴스
터렐은 조종사인 아버지를 따라 16세에 조종사 면허를 땄다. 애리조나 사막 위를 비행하던 중 사화산인 로든 분화구를 발견, 평생 작업의 중심으로 삼았다. 천문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24개의 관측 공간과 6개의 터널로 완공될 예정이다. 2019년에는 칸예 웨스트, 드레이크 등 대중 예술가들이 후원하면서 프로젝트에 대한 관심이 한층 높아졌다. "2000년 완성한다고 얘기했는데 계속 그 상태다. 건축가ㆍ예술가들이 빠지는 함정이 있는데, 종이에 터널을 그리면 아주 간단해 보이지만 실은 길이 300m이고, 400만 달러 넘는 돈이 들기도 한다"며 "주위에 박사 논문을 마치지 못한 친구 꼭 있을 텐데 저도 그중 하나라고 생각해 달라"며 웃었다.

원주 뮤지엄 산에 이어 제임스 터렐의 빛 설치 여러 점을 볼 수 있는 공간이 서울에 생겼다. 9월 27일까지. 연합뉴스

빛 설치 외에 홀로그램ㆍ판화ㆍ사진이 출품된 제임스 터렐 개인전 '귀환'. 연합뉴스
초기작 스카이스페이스(Skyspaces)는 건물 천장을 열어 자기만의 하늘을 볼 수 있게 한 작품이다. 하늘의 한 부분을 분리하면 구멍 주변의 빛에 따라 색을 바꿀 수 있다. 외부의 자극으로 우리가 본다고 여기는 것의 실체는, 실은 우리 마음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1978년 뉴욕 MoMA PS1 분관에서 시작한 그의 첫 공공 스카이스페이스의 제목은 ‘만남(Meeting, 1980-86/2016)’. 이후 원주 뮤지엄 산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 100개 가까운 스카이스페이스를 제작, 자기만의 하늘을 만나게 했다. 올해 그는 역대 최대 규모의 스카이스페이스를 덴마크 오르후스에 있는 아로스(ARoS)에 개관한다.
부인은 화가 이경림 씨로, 터렐은 한국과의 인연도 깊다. 1961년 겨울 라오스서 의료봉사요원으로 복무하다 중상을 입고 서울로 후송돼 군 병원에 입원한 경험이 있다. 지금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다. 그의 작품은 삶의 다면성을 단 하나의 요소인 빛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존재론적 경지로 통하는 창을 연다. 우리가 살아가고자 하는 평범한 일상에 우주적 경이를 더해준다. "여러분께 한 조각 빛을 전하고 싶다"는 그의 마지막 인사말은 이랬다. "저는 한갓 예술가이며, 예술이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건 아닙니다. 전 그저 제 일을 할 뿐이죠." 예술가로서의 자아를 주장하지 않는 그의 전시는 9월 27일까지. 무료이지만 예약제로 운영된다. 이미 두 달 치 주말 예약이 다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