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35년 차 현역 그룹 015B 장호일
1990년대의 개막과 함께 등장한 다양한 색깔의 X세대 뮤지션들은 이전과 다른 새로움의 상징과도 같았다. 015B도 이 시기에 뚜렷한 획을 그었다. ‘이젠 안녕’ ‘아주 오래된 연인들’ ‘신인류의 사랑’ 등 최근에도 리메이크되는 노래들로 기억되는 이들은 객원가수 시스템·TV 출연 거부·명문대(서울대·연세대) 출신 등 독특한 콘셉트와 배경도 화제가 됐다. 데뷔 35년 차가 된 015B는 지금도 매달 신곡을 발표하며 여전히 활동 중이다. 정석원·장호일이 함께 작업하고, 객원가수에게 노래를 맡기는 것도 그대로다. 매년 12곡, 과거 기준이면 음반 1개씩 내는 셈이다. 2025년 6월 신곡 ‘Keep Dreamin’을 발표한 18일 015B의 장호일을 만났다.
이름 015B, 무한궤도 아닌 조형곤 아이디

18일 신곡 ‘Keep Dreamin’을 낸 015B의 장호일은 “손가락이 어제와 비슷하게 움직인다고 느낄 때까지 음악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2018년부터 매달 싱글을 발표하고 있다.
“윤종신이 ‘월간 윤종신’을 내는 것이 자극됐다. 그의 성격이 게으르기 때문에 ‘얼마나 가겠나’ 지켜봤는데, 굉장히 오래 하더라.(웃음) 우리도 못 할 것 없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벌써 8년째가 됐다.”
윤종신이 데뷔 음반 객원가수였다. 객원가수를 도입한 이유가 있나.
“이렇게 오래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만약 015B를 만들 때 진지했다면 신중하게 메인 보컬을 찾았을 것이다.(웃음) 그때는 한 장 내고 말 건데 굳이 보컬을 구할 이유가 있을까 생각했다.”
015B는 1988년 대학가요제 대상을 받은 무한궤도의 멤버 정석원(키보드)·조형곤(베이스)과 세션맨이었던 장호일(기타)이 만들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015B가 무한궤도를 의미한다는 설도 있었다. 0=무(無), 1=한, 오비는 ‘궤도’를 의미하는 영어 ‘orbit’에서 따왔다는 것이다.
015B의 무한궤도 유래설이 사실인가.
“그럴듯한데 실제로는 아니다.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조형곤의 PC통신 아이디 ‘01orbit’에서 따왔던 것 같다.”
015B를 결성한 계기는.
“당시 무한궤도 소속사(대영기획)에서는 스타성을 갖춘 신해철의 솔로 활동에 더 관심이 컸다. 신해철을 제외하곤 나머지는 일종의 ‘깍두기’ 같은 존재랄까. 신해철의 솔로 데뷔가 임박하면서 회사에서는 다른 멤버들을 내보내긴 해야겠는데, 미안하니까 선심처럼 기념 음반으로 만들어준 게 015B의 1집이다.(웃음)”
멤버끼리 갈등이 불거졌을 법하다.
“아니다. 사실 신해철만 진지했고, 대부분 무한궤도 활동을 대학 시절 추억 정도로 여겼다. 다들 음악에 마음이 있었지만, 부모님이 바라는 좋은 직장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나도 015B 1집 녹음 직후 광고기획사에 입사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멤버들은 뮤지션이 되기엔 집안이 너무 좋기도 했다. 시간이 흐른 뒤 우리끼리 농담처럼 ‘평범한 집안 자식들만 계속 음악을 하게 된 것 같다’고 했다.(웃음)”

지난 2월 발매된 ‘015B 이어북(year book) 2024’에는 015B가 지난해 발표한 12곡이 수록되어 있다. 최영재 기자
2집도 냈다.
“윤종신이 부른 ‘텅빈 거리에서’가 음반 나오고 8~9개월 뒤 역주행을 했다. 그러자 기획사에서 ‘하나만 더 내자’고 했고, 2집을 만들며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이젠 안녕’에서 ‘음악 속에 묻혀 지내 온 수많은 나날들이/이젠 돌아갈 수 없는 아쉬움 됐네/(… )함께했던 시간은 이젠 추억으로 남기고/서로 가야 할 길 찾아서 떠나야 해요’ 같은 가사는 우리에게 하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사람 운명이 재밌는 게 ‘이젠 안녕’이 대박을 친 것이다. 미지근했던 기획사도 태도가 달라지고, 나랑 석원이도 음악을 전업으로 하자고 결심하게 됐다.”
정석원과 형제인데, 본명(정기원)을 두고 가명(장호일)을 쓰고 있다.
“회사에 다닐 때 가수 활동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2집을 낼 때까지만 해도 별로 유명하지 않았고, TV 출연도 하지 않으니 ‘이중생활’이 가능했다. 그런데 ‘이젠 안녕’이 유명해지면서 더 이상 안 되겠더라. 결국 회사에 사표를 내고, 3집부터 본격적인 뮤지션의 길을 걷게 됐다.”
015B는 1992년 3집 ‘아주 오래된 연인들’, 1993년 4집 ‘신인류의 사랑’이 가요 차트 1위에 오르는 등 연이어 히트하면서 음반도 100만 장 이상 판매하는 등 대성공을 거두며 전성기를 맞이했다.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를 했는데, 정작 무대엔 015B 멤버들이 없는 진풍경이 화제가 됐다.
“3집 ‘아주 오래된 연인들’로 첫 1위를 했는데, 번쩍거리는 조명만 보이는 무대와 음악만으로 채워졌다. 설마 우리가 안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거다. 방송국에선 ‘신해철은 나오는데 015B는 왜 안 되냐’며 회사에 항의를 많이 했다고 한다. 그래서 ‘신 인류의 사랑’이 1위를 했을 때는 객원가수(김돈규)가 나가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TV 출연하면 부와 명예가 보장되던 때였다. 출연을 기피한 이유가 있나.
“정석원이 대외 활동을 너무 싫어했고 조형곤도 TV 출연 등에 소극적이었다. 두 사람이 그런 데다 나도 대학에서 언론을 전공했는데 당시 방송 등 매스미디어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생각이 있었다. 젊은 날의 치기랄까.”
3·4집의 성공으로 떼돈을 벌었겠다.
“그게 아쉽다. 요즘 같으면 인세로 수십억원은 벌었을 텐데 당시는 지금처럼 체계적인 정산 시스템이 없던 때였다. 사장님은 늘 ‘5만 장만 팔렸다’고 말했다.”
타임머신 있다면 작사·작곡에 내 이름도
![지난달 신곡 ‘거북이’를 발표해 28년 만에 활동을 재개한 프로젝트 밴드 지니의 장호일, 신성우, 김영석(왼쪽부터). [사진 015B]](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506/21/c1a8e980-0c48-4ad2-a40f-23a7d9a91328.jpg)
지난달 신곡 ‘거북이’를 발표해 28년 만에 활동을 재개한 프로젝트 밴드 지니의 장호일, 신성우, 김영석(왼쪽부터). [사진 015B]
그럼 인세를 얼마나 받았나.
“정산이 불투명하니까 우리도 사전 ‘개런티’ 형식으로 돈을 받고 음반을 제작했다. 계약도 음반을 만들 때마다 새로 했다. 당시 이게 합리적으로 보였다. 물론 많이 팔리면 회사에서도 조금 챙겨주긴 했지만, 50만 장이 팔리든 100만 장이 팔리든 우리에겐 금전적으로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다가 6집 음반은 우리가 직접 제작했는데, 30만 장가량 팔렸다. 이전에 비하면 실패였는데, 돈을 이때 가장 많이 벌었다. 인세도 인세지만 나로서는 저작권료가 무척 아쉽다. 015B 노래 대부분이 정석원 작사·작곡으로 되어 있다. 노래를 만들 때 나도 분명히 기여를 했는데, 당시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타임머신이 만들어지면 이 문제를 꼭 잡고 싶다.(웃음)”
015B는 1996년 6집 음반을 내고 해체를 선언했다가 2006년 7집 음반으로 컴백했다. 이후 간헐적으로 활동을 이어오다가 2018년부터 매달 신곡을 내고 있다.
정석원의 근황이 궁금하다.
“2006년 10년 만에 컴백을 결정했을 때, 정석원이 내건 조건이 ‘곡 만드는 작업만 한다’였다. 콘서트 등에는 나오면 좋겠지만, 입장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 아이디어 회의 등은 자주 하고 있다.”
015B 측 관계자에 따르면 정석원은 가정을 꾸려,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8년째 매달 신곡을 내는 것이 힘들진 않나.
“처음엔 일단 했으니 3년은 채워야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월간 윤종신’도 계속 나오고 있으니 그만둘 수 없을 것 같다. ‘저기가 그만두면 나도 그만둬야지. 안 그만두네? 그럼 나도 계속할 수밖에… ’ 이런 분위기다.(웃음)”
화려했던 과거 같지는 않다.
“과거엔 아이돌 같은 인기를 누렸다. 꽤 거만해서 여성 팬도 많다고 생각했고, 농담처럼 ‘손가락을 뻗으면 100명이 쓰러진다’라고도 했는데, 감사한 것이 ‘지니’를 결성하고 신성우씨를 만난 거다. 그 앞에 서니까 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지니는 1995년 장호일이 신성우와 결성한 프로젝트 밴드다. 지난 달에도 신곡 ‘거북이’를 발표했다. 2집 활동 후 28년 만으로 이번엔 그룹 넥스트 출신 김영석이 합류했다.
뮤지션으로 언제가 더 행복한가.
“요즘 공연을 마치고 집에 오면 유튜브에서 해외 공연을 찾아보거나 연주를 한다. 그러면서 내가 음악과 기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새삼 느끼고 있다. 음악을 수십 년간 해왔고, 지금도 할 수 있다는 것에 행복하다. 또, 예전엔 없던 신기한 테크놀로지와 장비들이 많이 생겼다. 음악을 만드는 입장에선 이런 데서 느끼는 만족감과 행복감이 크다.”
50대가 넘었지만, 왕성하게 활동한다.
“폴 매카트니나 스티븐 타일러(에어로스미스) 같은 분은 70이 넘어도 마이크 스탠드를 휘두르면서 무대에서 뛰어다니고 몇 시간 동안 노래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야 후배들도 우리를 보고 벤치마킹을 할 수 있지 않겠나.”
앞으로 목표는.
“꾸준히 음악을 잘하는 거다. 나이가 드니까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걸 유지하는 것도 힘들어진다는 걸 깨닫고 있다. 피지컬이 떨어지면 연주력에도 영향을 끼친다. 운동을 좋아해서 하는 게 아니라 기타를 들고 뛰어다니려면 근육이 필요해서다. 손가락이 어제와 비슷하게 돌아간다고 느낄 때까지는 계속 음악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