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 '강경 투쟁' 이끌던 박단 전격 사퇴…의정 대화 급물살탈 듯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4월 20일 서울 중구 숭례문 일대에서 열린 '의료정상화를 위한 전국의사궐기대회'에서 연대사를 하고 있다. 뉴스1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4월 20일 서울 중구 숭례문 일대에서 열린 '의료정상화를 위한 전국의사궐기대회'에서 연대사를 하고 있다. 뉴스1

1년 4개월째 이어진 의·정 갈등 국면에서 전공의 집단사직 투쟁을 주도해온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비상대책위원장이 리더십 논란 끝에 24일 사퇴했다. 대표적인 강경파인 그의 퇴진을 계기로 의·정 대화가 급물살을 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박 위원장은 이날 전공의 대상 공지와 페이스북을 통해 "모든 직을 내려놓고자 한다. 지난 1년 반 부족하나마 최선을 다했으나 실망만 안겨드렸다"고 밝혔다. 그는 "모든 것이 제 불찰이다. 모쪼록 사태가 조속히 해결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고 덧붙였다. 

전공의들은 지난해 2월 정부의 의대 증원 방침에 반발해 집단 사직에 돌입했고, 대전협은 비대위 체제로 전환됐다. 당시 회장이던 박 위원장은 비대위원장을 맡아 투쟁의 중심에 섰다. 그는 윤석열 정부의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와 2000명 증원 전면 백지화 등이 담긴 '7대 요구안'을 복귀 조건으로 내세우며 강경 노선을 고수해왔다. 

박단 위원장이 지난해 4월 윤석열 당시 대통령을 만난 뒤 페이스북에 쓴 글.

박단 위원장이 지난해 4월 윤석열 당시 대통령을 만난 뒤 페이스북에 쓴 글.

지난해 4월 윤석열 당시 대통령과 박 위원장이 140여분간 독대한 것은 의정 갈등의 상징적인 장면으로 꼽힌다. 그렇게 존재감을 키운 그는 대화나 복귀를 권유한 일부 의대 교수를 향해 "중간착취자"라며 날을 세웠다. 그의 대정부 대응 기조는 '탕핑(드러눕기)'으로 요약된다. 요구 사항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단체로 버티면 이긴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지난 6월 대선 이후 정권이 교체됐음에도 입장이 달라지지 않자 내부 불만이 점차 고조됐다. 박 위원장은 사퇴 전날인 지난 23일에도 "의료 사태는 여전히 막막하다"며 단일대오 유지를 강조했다.


굳건해 보였던 그의 입지는 대형병원 전공의들의 이탈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울 '빅5' 병원 중 서울대병원·서울아산병원·세브란스병원 전공의 대표들은 이날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이제 의정 갈등을 하루빨리 종식해야 한다"며 대전협과 결별을 선언했다.  

박 위원장의 갑작스러운 사퇴로 의정갈등은 중대한 분기점을 맞게 됐다. 빅3 병원과 고려대의료원(안암·구로·안산병원) 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는 이날 "새로운 정부가 출범했다. 이제는 반드시 달라져야 한다"는 공동 성명을 냈다. 그러면서 ▶윤석열 정부의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와 의료개혁 실행방안 재검토 ▶보건의료 거버넌스의 의사 비율 확대와 제도화 ▶열악한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과 수련 연속성 보장을 요구했다. 

정정일 서울아산병원 전공의협의회 비대위 부대표는 이날 통화에서 "요구안에 (의정갈등 책임은) 윤석열 정부라는 걸 명시해 전 정부의 과오를 함께 재논의해 해결해보자는 의미를 담았다"고 말했다. 7대 요구안을 철회한 것이다. 

의료계에선 "의정 갈등 해소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이들 병원 대표 4명은 오는 26일과 28일 이틀에 걸쳐 대전협 임시 대의원총회를 열기로 했다. 이들 병원 소속 한 전공의는 "정권이 바뀌었으니 '적극적으로 대화하자'는 내부 의견이 모였다"라고 말했다. 

박 위원장의 퇴장을 두고 전공의 사이에선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복귀를 희망하는 전공의·의대생 500여명이 모인 단체 대화방에서는 "아무것도 얻은 게 없다. 시간 날렸다", "마지막까지 책임지지 않았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한 사직 전공의는 "1년 4개월을 허비했다고 스스로 인정한 것 같다"며 허탈해했다. 

한편에선 박 위원장에게 힘을 실어줬던 김택우 대한의사협회(의협) 회장 등 집행부에 대한 책임론도 제기되고 있다. 박 위원장은 의협 부회장직도 겸임하고 있는데, 의협은 그의 사퇴 의사와 관련한 입장을 조만간 수렴할 예정이다. 

박 위원장과 갈등을 빚다 지난해 11월 탄핵당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은 박 위원장을 강하게 비판했다. 임 전 회장은 "박 위원장은 전공의·의대생, 국민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데도 바라만 봤다"라며 "나를 탄핵하고도 반년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기 정치만 하다가 결국 무책임하게 도망쳤다"라고 비판했다. 이어 "지난해 의정갈등 해결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 번번이 박 위원장이 걷어찼다"라며 “지난해 봄 대통령실·정부와 협상이 거의 막판 단계에 이르러 전공의 단체만 대화에 참여하면 되는 상황까지 갔는데 '임현택과는 함께 하지 않겠다'며 밥상을 엎었다"라고 주장했다. 

환자·시민 단체는 전공의들의 조건 없는 복귀를 촉구하고 있다. 김성주 한국중증질환연합회 대표는 "전공의들은 더는 조건을 걸지 말고 하반기 수련부터 빠르게 복귀해야 한다"면서 "현장에 돌아온 뒤 필요한 정책을 요구하고 협의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남은경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사회정책국장도 "전공의들이 원하는 정책이 있다면 장외가 아니라 사회적 논의 테이블에 앉아서 풀어야 한다. 정부도 더는 수련 특례 등의 양보를 하면 안 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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