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김군'의 출발점이 된 사진.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중앙일보 기자가 찍었다. [사진 영화사 풀]
“결과를 예정하고 시작한 작업이 아니었어요. 그가 알고 보니 북한군이었다면, 북한군이라고 영화를 찍었을 거예요.”
23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김군’에서 39년 전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사라진 한 청년의 행방을 좇은 강상우(36) 감독의 말이다. 유일한 단서인 흑백사진에서 청년은 군모와 무기를 갖추고 군용 트럭에 탄 매서운 모습. 2015년 보수논객 지만원이 “당시 광주에 침투했던 북한특수군 제1광수”라 주장한 바로 그 사진이다. 감독을 붙든 건 그 즈음 알고 지내던 광주시민 주옥 씨가 들려준 전혀 다른 기억이었다. “우리 (시민군) 차에 주먹밥 올려줄 때 그 사람, 넝마주이 김군 아니야?”
지난해 5월 시민군 생존자 최진수 씨의 결정적 증언을 얻기까지, 청년의 생사도 모르고 시작한 추적은 4년이 걸렸다. 무수한 연구‧기록물, 100명 넘는 인터뷰를 그는 장편 데뷔작에 긴장감 있게 펼쳐냈다.
지난해 여러 영화제에서 호평이 잇따랐다. 대상을 안긴 서울독립영화제는 이런 심사평을 남겼다. “영화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호령하는 새로운 시각과 다른 방식을 제시했다.” 앞으로 ‘광주’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영화라는 얘기다.
"이 영화 하며 고향 질문 제일 많이 받았죠"
23일 개봉하는 5.18 다큐 '김군'으로 장편 데뷔한 강상우 감독을 개봉 전 만났다. [사진 영화사 풀]
“고향은 서울이에요. 이번 영화 하며 고향 질문을 제일 많이 받았어요.” 개봉 전 만난 그의 말이다.
“사실 5‧18에 대해 잘 몰랐다. 광주에도 5년 전 처음 갔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찾은 독일 공연집단 ‘리미니 프로토콜’이 광주 사람들을 그린 다큐멘터리 연극 과정을 기록하는 촬영 ‘알바’였다. 그 공연으로 주옥 선생님을 알게 됐다. 이듬해 5‧18 민주화운동기록관 개관 당시 한동네 살던 김군을 무심코 알아보셨다. 동일한 사진 속 인물을 두고 ‘일베’나 지만원씨는 전혀 상반된 악담을 하고 있는 게 흥미로웠다.”
보수논객 지만원이 사진 속 인물을 북한 농업상이라 주장한 사진. [사진 영화사 풀]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사진. 다수의 빨간 점은 지만원이 북한군이라 지목한 인물들이다. [사진 영화사 풀]
영화엔 지만원이 직접 나와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한다. 감독은 “제가 제1광수라 지목한 분에 대한 다큐 작업을 하려 한다고 될 수 있는 한 솔직하게 다가갔다”고 했다.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레드컴플렉스를 한눈에 보여주더라. 그의 사무실에도 사진이 걸려있는 당시 11공수여단(5·18 진압부대) 부대원들은 이를 통해 자신들의 과거 기억을 정당화하려 했다. 이 조악한 주장을 과학적 검증, 사실로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런데 2015년 당시 유일하게 살아있는 5‧18 관련 스토리텔링이 그의 것밖에 없었다. 실체가 뭐든 1980년 김군의 이미지가 '북한군'이란 라벨이 찍혀 생명력을 갖고 떠돌고 있었다. 정작 당사자는 왜 안 나타날까. 그해 광주의 기승전결은 아니지만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담아보자. 그 과정에서 만난 시민군 생존자들 말 하나하나가 우리가 잘 몰랐던 순간들을 알려주리라 생각했다.”
광주시민 주옥 씨는 흑백사진 속 인물이 한동네에 살던 넝마주이 김군이라 증언했다. [사진 영화사 풀]
“우리가 그때 민주화고 뭐고 그런 생각했을 나이도 아니고, 단지 일반시민들이 그렇게 죽어 나가는 걸 보고 대들었지.” 열아홉 재수생이었던 당시 계엄군에 살해당한 시신에 분노해 시민군에 합류했다는 양동남씨 증언이다. 지만원이 제36 광수라 주장한 사진 속 인물이다. 광주도청에서 계엄군에 체포돼 고문 받은 그는 한평생 후유증에 시달렸다. 애타게 기다린 아들을 시체더미에서 발견한 어머니, 눈앞에서 사살 장면을 목격한 시민군 생존자도 있었다. 생존자는 자신보다 한 발 먼저 나선 친구가 계엄군의 총에 참혹하게 조각난 광경을 죄책감으로 안고 살았다.
감독은 “제가 만난 시민군들은 의식화된 분들이 아니다. 자신을 룸펜, 양아치라 부르기도 했다”면서 “그런데 순전히 몸소 목격한 것들로 인해 나설 수밖에 없었다. 커피숍, 음악다방에 군인이 쳐들어와 누군가 머리 붙잡고 때리고 벗기고 끌고나가는 장면을 아연실색해서 바라보다 안 되겠다 싶어 싸웠고, 어쩌다 보니 도청에서 붙잡혀 인생이 바뀐 케이스가 많았다. 전두환이 누군지, 민주주의가 뭔지 몰랐지만 차마 뭔가 하지 않고서는 인간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고 돌이켰다.
청년의 정체를 찾는 과정에서 오른쪽 휴대폰 사진 속 5.18 시민군 생존자 이강갑 씨 등이 주목되기도 했다.[사진 영화사 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무기를 들었단 발언도 나온다.
“실제 예비군 무기고를 제일 먼저 턴 분들의 증언이다. 결과적으론 시민들이 생존을 위해 총을 들도록 계엄군이 자극했다. 1985년 출간된 5‧18 기록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공동 기록자인 이재의 선생님이 준 조언 중 하나가 군 기록도 조작한 증거가 있으니 믿지 말라는 것이었다. 시민군들 진술서도 고문당하며 쓴 게 많아, 모든 걸 의심 또 의심하며 교차 검증해나갔다.”
“5월 생존자에게 연락드리는 것 자체가 상처를 되새기는 일이어서 인터뷰가 조심스러웠다. 약속을 잡고도 나타나지 않은 분들도 많다. 자식이 공무원이어서 해가 될 거라고 믿거나, 여전히 5‧18이 폭동이라 믿는 사람들 때문에 자신이 관련됐다는 걸 알리기 두려워하셨다. 넝마주이나 고아의 경우 실종신고를 할 가족도 없어 어딘가 암매장됐더라도 공식적인 사망‧실종자 기록에 포함되지 않았다. 누군가 북한군이라 주장해도 밝힐 수 없는, 광주항쟁의 약한 고리였다. 2016년 이후 진전이 없어 고민도 했지만, 그만둬야겠단 생각은 안 들더라.”
다큐멘터리 '김군'에 등장한 5.18 당시 기록 사진. 이창성 전 중앙일보 사진기자가 찍은 것으로, 그가 2008년 펴낸 사진집 『28년만의 약속』에도 실렸다. [사진 이창성]
계엄군에 무력 진압당하며 쓰러진 광주 시민. 이창성 전 중앙일보 사진기자가 목격했다. [사진 이창성]
“사진 속 청년의 강렬한 이미지 그 자체다. 5‧18 하면 항상 무겁고 윗세대에 강요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80년 5월 당시 사진 속 시민군은 대부분이 10대, 20대 초반이었다. 프레임에 담긴 젊음과 현실의 침식된 50~60대 얼굴 뒤엔 비극적 사건이 드리워있었다. 직접 경험한 생존자의 목소리와 이를 그대로 보존한 사진이 있다면 5‧18을 겪지 않은 우리 세대와 그 시절 청년들의 이야기를 직접 연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출발점이 된 흑백사진을 비롯한 그 5월 광주의 사진들은 이창성 전 중앙일보 사진기자가 제공한 것. 이번 영화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21일 밤새 계엄군과 시민군의 유탄‧총격에 겁이 나고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다음날 용기를 내 카메라를 들었다”면서 “그날 벌써 시민군은 총을 내려놓기 시작했지만 27일 군이 도청을 기습했다. 저는 진보도 보수도 아니다. 하지만 진실은, 역사는 정말 제대로 기록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극장에 개봉하는 영화는 영화제 상영 버전에서 5분가량 덜어냈다. 감독은 “변호사‧연구자 인터뷰, 관련 뉴스영상을 최소화하고 생존자들의 증언과 체험에 집중했다, 저처럼 5‧18을 겪지 않은 세대와도 호흡할 수 있도록 신경 썼다”고 했다.
영화에는 주요 증언에 나선 5.18 생존자 세 사람이 극장에서 당시 사진을 마주하는 모습도 담겼다. [사진 영화사 풀]
그는 컴퓨터 관련 직종에 종사하다 어릴 적 꿈인 영화로 돌아섰다. 단편 ‘백서’(2010)엔 양심적 병역거부로 수감됐던 자전적 이야기를 담기도 했다. “좋은 영화란 결국 경험하거나 느끼지 못한 감각의 근육을 일깨워줌으로써 세상을 달리 바라보게 하는 것”이라 했다.
여전히 왜곡된 주장이 난무하는 5‧18에 대해 그는 규명돼야 할 사건이 많다고 강조했다. “영화 말미 짧게 증언된 송암동 양민학살도 생존자 증언 채록 작업이나 조사가 미비합니다. 계엄군에 의한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의 증언도 작년에야 시작됐어요. 제가 만난 많은 생존자분들은 당시 폭도로 낙인 찍혀 제대로 된 직업은커녕 병원치료도 제대로 못 받은 분이 많았어요. 5‧18은 결국 시민학살이죠. 더 많은 진실이 밝혀져야 합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