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강진 월남사지

김정탁 노장사상가
문화는 크게 세 단계로 구성된다. 첫째가 오감 만족 단계이다. 이 단계에선 오감이 즐거워야 하는데 우리가 흔히 아는 문화이다. 둘째가 머리로 이해되는 단계이다. 이를 위해선 스토리텔링이 전제돼야 하는데 이것이 신화로 이어지면 금상첨화다. 참고로 짧은 기간에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룩한 대한민국은 외국인에게 신화로 여겨진다. 마지막은 마음으로 와 닿는 단계이다. 산사 체험(템플스테이)을 가장 인상에 남는 한국체험이라고 말하는 서구인의 말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 우리 문화는 세 요소를 적절히 다 갖춘 데다 마지막 단계가 다른 나라 문화와 비교해 더욱 도드라져서 문화경쟁력이 남다르다.
빈터만 남은 고려시대 최대 사찰
탑 앞에 서면 한없이 겸손해져
월출산도 거대한 탑으로 다가와
편안하고 장엄한 풍경에 삼매경
텅빈 듯 가득찬 ‘허의 세상’ 감동
“나를 죽여야 내가 살아” 깨우쳐
탑 앞에 서면 한없이 겸손해져
월출산도 거대한 탑으로 다가와
편안하고 장엄한 풍경에 삼매경
텅빈 듯 가득찬 ‘허의 세상’ 감동
“나를 죽여야 내가 살아” 깨우쳐
신라 반가사유상과 로댕의 조각
![전남 강진 월남사지 3층석탑 뒤로 월출산이 환하게 보인다. 비움과 채움의 역동성을 느낄 수 있다. [사진 김정탁]](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205/16/8feb5757-c90d-43e2-a0e3-51557f63b9f2.jpg)
전남 강진 월남사지 3층석탑 뒤로 월출산이 환하게 보인다. 비움과 채움의 역동성을 느낄 수 있다. [사진 김정탁]
반가사유상 말고 또 없을까. 분명히 많을 텐데 그중에서 전남 강진의 월남사지 삼층석탑을 꼽고 싶다. 월남사(月南寺)는 월출산 남쪽에 있는 절이라는 뜻인데 고려시대 최대 사찰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탑만 유일하게 남아서 절의 넓은 공간을 외롭게 지키고 있다. 그런데 이 탑을 멀리서 바라보면 외롭기는커녕 장엄하게 느껴진다. 또 월출산 아래 확 트인 넓은 공간을 혼자서 우뚝 지킨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장엄하다 못해 거룩하게도 느껴진다. 그래서 누구든 이 탑 앞에 서면 한없이 겸손해지면서 여기에 의지해 갖은 고통과 번민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난다.
월남사지 삼층석탑 자체는 편안한 모습을 한다. 이런 모습은 고려시대 탑의 특징이기도 한데 신라시대 탑의 단아함과 비교된다. 단아함 앞에선 마음이 정갈해져도 편안함에 이르지 못한다. 게다가 월남사지 탑에서 느껴지는 장엄함은 탑의 배경인 월출산이 한몫을 담당한다. 탑 앞에 서면 탑 뒤의 배경으로 있는 월출산이 또 하나의 거대한 탑으로 느껴진다. 편안함과 장엄함은 서로 모순되는 느낌이어도 자연스럽게 와 닿는 건 월출산과 탑이 서로 교차하면서 상승작용을 일으켜서다. 그래서 월출산이 없는 월남사지 탑의 편안함도 생각할 수 없지만, 월남사지 탑이 없는 월출산의 장엄함도 생각할 수 없다.
닮은 듯 다른 익산 미륵사지탑
![월남사지에 남아 있는 진각국사묘비. [사진 강진군청 김종식]](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205/16/d9f94ef4-b532-405c-809e-3090364d9fe6.jpg)
월남사지에 남아 있는 진각국사묘비. [사진 강진군청 김종식]
비움, 즉 허(虛)는 없다고 하는 무(無)와 다르다. 허는 있어도 그 안이 비어 있는 데 반해 무는 있음 그 자체가 없다. 그래서 무는 관념 내지는 언어상으로만 존재한다. 반면 허는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있다. 채워졌다 비워지면 허의 상태가 돼서다. 그래서 허의 반대 개념은 있다는 유(有)가 아니라 채움이라는 만(滿)이다. 즉 채우면 ‘만’이 되고, 비우면 ‘허’가 된다. 따라서 허도 만처럼 존재하는 게지 결코 무가 아니다. 『도덕경』과 『장자』를 읽으면 이런 허의 개념을 자주 접한다. 그만큼 허, 즉 비움은 노장사상을 대표한다.
![월남사 인근은 예부터 차로 유명했다. 관련 기록이 나오는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사진 국립중앙박물관]](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205/16/a5cb1801-6002-46d0-836e-dc7a9707e419.jpg)
월남사 인근은 예부터 차로 유명했다. 관련 기록이 나오는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반면 아집(我執)에 빠지면 쓸데없는 욕망으로 마음만 혼란스럽다. 이렇게 보면 유가는 ‘채움의 가르침’을, 노장과 불가는 ‘비움의 가르침’을 각각 강조하는 셈이다. 서양 심리학도 아(我)에 해당하는 에고(ego)를 중심으로 펼쳐지므로 ‘비움의 심리학’이 아니라 ‘채움의 심리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문화 영역에서도 ‘비움의 미학’이 소홀히 된 채 ‘채움의 미학’이 이를 대신한다.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도 그중 하나다. 필자는 여기가 빈 곳으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 여전하다. 이 건물이 없다면 지금 마음껏 뛰놀며 즐길 수 있는 큰 공간을 접한다. 서울운동장 터였기에 더욱 그러해야 한다. 도심에서 이런 큰 공간을 만나는 건 세계의 어떤 메트로폴리탄 시민도 누리지 못하는 특권이다. 건축학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해도 이 넓은 공간을 혼자서 다 차지하는 건 채움의 미학이 저지르는 횡포로 보인다. 그래서 여기는 한 건축가를 위해 헌납한 공간이지 시민을 위해 헌납한 공간이 되지 못했다.
지금 월남사지에도 채움의 미학이란 어두운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사찰의 건물 복원작업이 계획돼서다. 복원이 안 된 채 탑만 오롯이 있는 게 미학적으로 훌륭할뿐더러 불가의 가르침을 훨씬 더 잘 구현하고 전달할 수 있다. 그래서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건립과 같은 실수가 여기서 되풀이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차로 맺어진 다산과 초의선사
![다산 정약용이 즐겨 마신 강진 옥판차를 전승하고 있는 이현정씨. [사진 김정탁]](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205/16/cf5b06da-cd3e-4563-9b23-a3f9251548fa.jpg)
다산 정약용이 즐겨 마신 강진 옥판차를 전승하고 있는 이현정씨. [사진 김정탁]

다산 정약용

초의선사
김정탁 노장사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