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어로 수업해" 학교장도 납치…러 야욕 드러낸 점령지

지난달 13일 우크라이나 체르니히우에서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학교 내 복도. [AP=연합뉴스]

지난달 13일 우크라이나 체르니히우에서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학교 내 복도. [AP=연합뉴스]

우크라이나 북동부의 한 학교 교장인 니나(48·가명)는 지난달 말, 러시아군에게 느닷없는 가택 수색을 당했다. 무장한 러시아군이 오전 6시에 갑자기 들이닥치더니 니나의 집 곳곳을 들쑤시고, 심지어 야외 화장실과 배수관까지 헤집었다.

이들이 찾아낸 건 다름 아닌 우크라이나어로 발간된 언어 교과서. 군인들은 니나를 학교로 끌고가 우크라이나의 역사 교과서를 넘기라고 명령했다. 이어 사상 검증이 시작됐다. 니나에게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에 대한 입장"부터,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는 이유" "우크라이나 교회에 다니는 까닭" 등을 캐물었다.

니나는 "(러시아군은) 내가 너무 애국적이고 민족주의적이라고 비난하더니, 내 딸과 아들까지 들먹이며 협박했다"면서 "풀려나자마자 가족들을 데리고 도망쳤다"고 몸서리쳤다.

16일(현지시간) 미국 CNN 방송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공교육 시스템을 파괴하고 러시아식 사고 체계를 주입하는 '러시아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세르히 호르바초우 우크라이나 교육 옴부즈맨(시민고충처리담당관)은 "러시아가 장악한 우크라이나의 동부와 남부 도시에서, 교사들은 기관총을 든 러시아군의 통제 하에 러시아식 교육과정을 따라 가르치도록 강요받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점령지인 루한스크주에서는 교육 당국에서 일선 학교로 '러시아식 커리큘럼을 따르라'는 공문을 내려보냈다. 학교 수업에서 우크라이나어 사용을 아예 금지하는 경우도 있다. 호르바초우는 "교사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폭력과 강압 속에 수업하고 있다"며 "학교장과 교육감이 납치당한 사례도 있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외곽 소도시 이르핀에 있는 한 어린이 놀이터가 러시아군 폭격으로 망가져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외곽 소도시 이르핀에 있는 한 어린이 놀이터가 러시아군 폭격으로 망가져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수학을 가르치는 한 교사는 "러시아 교과서로 수업하라는 명령을 거부하자, 교육 당국이 '당신에 대한 모든 파일을 갖고 있다'고 위협했다"고 말했다. 이어 "e메일로 러시아어로 된 교과서를 전송한 뒤, '어차피 러시아어든 우크라이나어든 수학은 어차피 똑같다'고 강요했다"면서 "그들은 이곳 학생들은 대학에 가지도 못할 것이고, 노동자나 군인으로 자랄 것이라고 조롱했다"고 분개했다.

 
CNN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완전히 복속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내면서, 교육 분야는 잠재적인 전쟁터이자 희생양이 됐다"고 전했다. 실제로 러시아군은 개전 초기부터 학교 건물을 집중적으로 포격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지난 2일 연설에서 "개전 이후 우크라이나 전역의 교육기관 1570여 곳 이상이 폭격으로 파괴되거나 파손됐다"고 밝힌 바 있다. 우크라이나 국영 교육분석연구소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전역의 재학생 423만 명 중 대다수가 공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다.

공교육 시스템을 파괴하고, 러시아식 커리큘럼을 강요하는 '러시아화'는 지난 2014년 러시아가 강제 병합한 크림반도에서도 자행된 일이라고 CNN은 전했다. 크림반도의 알멘다 시민교육센터에서 일하는 올레 오크레르코 분석가는 "이곳에서 러시아군은 교육의 군사화를 시작하고 실험했다"고 전했다. 러시아는 크림반도의 학교 교과서에서 우크라이나를 철저히 지우고, 모든 내용을 '러시아의 역사'로 만들었다. 오크레르코는 "이같은 방식으로 교육받은 학생들은 이번 전쟁의 원인이 미국과 우크라이나에 있다고 보고, 이들 중 일부는 불행히도 (러시아편에 서서) 조국과 맞서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교육의 '러시아화' 시도에, 우크라이나 교사들의 저항이 이어지고 있다. 러시아군의 감시를 피해 온라인으로 우크라이나 언어와 역사 등을 가르치는 교사도 생겼다. 하지만 이마저도 교전이 잦아지면서 인터넷 연결과 전기가 끊겨 중단된 상태다. 루한스크주의 한 교사는 "아직 학교에는 러시아군이 빼앗지 못한 좋은 책과 교재들이 많이 있다"면서 "하루빨리 우크라이나군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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