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 파이터로서의 중앙은행 본연이 역할이 다시금 중요해지고 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10일 오전 서울 중구 부영태평빌딩에서 열린 한국은행 창립 제72주년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윤성호 기자
이 총재의 말처럼 물가 상승은 매섭다. 5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1년 전보다 5.4% 올랐다. CPI 조사 대상 458개 품목 중 가격 상승률이 10% 이상인 품목만 93개(20.3%)에 달했다.
들썩이는 에너지·곡물 가격은 물가상승을 부채질하고 있다. 9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에서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가격은 배럴당 121.51달러를 기록했다. 올해 들어 국제 유가는 60% 급등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으로 치솟은 곡물 가격 상승도 장기화할 수 있다. 이 총재는 지난달 26일 “국제 유가가 안정되더라도 높은 곡물 가격이 상당 기간 지속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경제 주체들의 물가 상승 기대도 오르고 있다. 일반인들의 기대인플레이션율은 지난 1월 2.6%에서 지난달 3.3%로 뛰었다. 기준금리 인상과 정부의 각종 대책에도 물가가 오를 것으로 전망하는 이들이 늘었다는 의미다. 한은은 전날 발표한 통화신용정책 보고서를 통해 “최근 기대인플레이션 상승이 이미 물가 상승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고, 그 압력이 더 커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이 총재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5%를 웃돌고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정상화 속도와 강도를 높여가는 상황에선 더는 (한국은행이) 선제적으로 완화 정도(선제적 긴축)를 조정해 나가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금리 인상으로 단기적으로는 취약계층의 어려움이 커질 수 있겠지만, 자칫 시기를 놓쳐 인플레이션이 더욱 확산된다면 그 피해는 더 크게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금리 인상에 따른 부작용이 있더라도 물가 상승을 잡기 위해서는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다는 취지다. 한은은 지난달에도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연 1.5→1.75%)했다.
시장의 관심은 금리 인상 폭과 횟수다. 기준 금리를 결정하는 금통위 회의는 올해 4차례(7ㆍ8ㆍ10ㆍ11월) 남은 상황이다. 금융권에서는 한은이 이중 적어도 3차례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올릴 것으로 보고 있다. 박종석 한은 부총재보는 전날 기자간담회에서 연말 기준금리를 연 2.5~2.75%로 보는 시장 전망에 대해 “합리적인 기대”라고 평가했다. 지난달 26일 이 총재가 기자간담회 때 밝힌 합리적 기대수준(연 2.25~2.5%)이 소폭 높아졌다. 연말 기준금리가 연 2.75%에 도달하려면 회의 때마다 0.25%포인트씩 인상해야 한다.
물가를 잡기 위해 한은이 빅스텝을 밟을 수도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다만 전날 박 부총재보는 “빅스텝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면서도 “아직까지는 0.25%포인트씩 인상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빅스텝을 밟기에는 올해 1분기 말 1859조4000억원으로 불어난 가계부채 규모가 부담이다.
![한미 기준금리추이 인상시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 Fed ·한국은행]](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206/10/48ca7978-e865-46e8-bc03-8932fb1b8c4a.jpg)
한미 기준금리추이 인상시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 Fed ·한국은행]
일본은행(BOJ)과 함께 완화적 통화정책을 유지하던 유럽중앙은행(ECB)도 물가에 백기를 들었다. ECB는 9일(현지시간) 통화정책회의를 열고 7월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특히 ECB는 "중기적으로 물가상승률 전망이 유지되거나 악화되면 9월에는 더 큰 폭의 인상이 적절해 보인다”며 빅스텝 가능성도 내비쳤다.
ECB가 7월에 기준금리를 올릴 경우 2011년 7월 이후 11년 만의 기준금리 인상이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지난 11년간은 디플레이션(경기 침체를 동반한 물가 하락)을 막기 위해 인플레이션을 끌어올리려 했지만, 지금은 인플레이션을 다시 끌어내려야 하는 정반대의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금리 인상의 남은 변수는 경기 둔화다. 기준금리 인상으로 시장 금리가 뛰면 가계는 이자 부담에 소비를 줄이고, 기업은 투자를 늦출 수 있다. 이 총재도 ”중국의 경기둔화, 주요국 중앙은행의 금리 인상 가속화 등으로 글로벌 경기가 침체할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와 향후 물가와 성장 간 상충 관계가 더욱 커지면서 통화정책 운영에 어려움이 가중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 총재는 이날 기념사를 통해 ‘수평적 외부지향적’ 조직문화로의 개선도 강조했다. 이 총재는 “업무에 관한 한 ‘계급장 떼고’, ‘할 말은 하는’ 조직 문화를 만들어 조직 내 집단지성이 효율적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하자”며 “조사역이 저와의 점심 자리에서 ‘지난번 총재님 연설문은 실망스러웠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경직된 위계질서를 없애는 데 앞장서겠다”고 말했다.